칼럼 > 연재종료 > 이라영의 정치적인 식탁
에필로그 : 할머니들을 위하여
할머니들에게 ‘나’는 있었던가
장례식인지 만찬 회동인지 알 수 없는 그 개미떼의 행렬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먹는다는 건 매번 장례식이구나. 내 식탁은 늘 다른 누군가에게는 장례식인 셈이다. 내 삶은 누군가의 죽음을 흡수하며 지탱한다. (2018. 06. 26)
가에타노 벨레이 Gaetano Bellei, <할머니와 손녀>
“콩나물과 숙주도 구별 못 하던 네가 대체 뭘 만들어 먹고 살까. 난 그게 궁금해. 괴식을 먹고 사는 거 아냐?” 친구의 전화. 그는 숨이 넘어가게 깔깔 웃는다. 나도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 낸다. 그랬구나. 아, 그랬지. 내가 숙주와 콩나물도 구별 못 하던 때가 있었지.
십수 년 전 할머니의 첫 제삿날이었다. 제사상에 잡채가 올라왔다. 웬 잡채? 엄마가 말하길, 할머니가 잡채를 좋아했다고 한다. 맞다. 대학 다니면서 나는 할머니가 해주는 밥을 많이 먹었다. 밥상에 잡채가 자주 올라왔다. 할머니가 만들던 잡채는 당면에 콩나물인지 숙주인지를 넣은 단순한 잡채였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콩나물 혹은 숙주만 넣은 잡채를 심심하게 만들어 양념간장에 찍어 먹길 좋아했다. 나는 당시에 그저 주는 대로 먹기만 할 뿐 식재료나 요리에 아무 관심이 없을 때라 콩나물과 숙주도 구별하지 못했다. 콩나물과 숙주 얘기만 나오면 할머니의 잡채가 생각난다.
얼마 전 할머니 제사와 엄마 생일이 연이어 지나갔다. 제사는 싫어도 할머니들에게는 어쩐지 제삿밥이라도 꼭 챙겨야 할 거 같다. 살아서는 남들 밥만 챙겨주던 할머니는 죽어서야 편히 밥상을 받는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엄마만 보면 손을 잡고 울었다. 결혼해서 보니 식구들 생일밥상을 계속 차리는데 정작 아무도 며느리에게 생일 밥상을 차려주진 않더라고. 그래서 나중에 자신은 꼭 며느리에게 생일 밥상을 차려줘야겠다 다짐했단다. 할머니가 밥을 해준 적은 많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생일 밥상’에 따로 의미를 두었다. 할머니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엄마의 생일은 초여름인데 엄마와 할머니는 그 시기에 만난 적이 없다. 서로 다른 도시에 살면서 주로 방학 때 만나다 보니 늘 할머니가 차려주고 싶은 ‘며느리 생일밥상’은 미뤄졌다. 나중에는 너무 늙어서 해줄 수가 없었다. 혀는 맛을 잃었고, 말도 잘 안 들리고, 눈도 잘 보이고, 정신도 들락날락 하면서 앞에 사람을 두고 누구인지 물었다. 누구고, 애미에요, 애미라고? ‘애미’ 소리를 들으면 그때부터 운다. 내가 애미 생일상을 차려주려 했는데.......
엄마의 생일날. 엄마는 뷔페가 좋다고 했다. 더 근사한 요리를 먹자고 해도 엄마는 그냥 뷔페가 좋단다. 가위질도 불조절도 할 필요 없고, 누구의 수발도 들 필요 없이 내 마음대로 골라 먹는 뷔페. 식구들 입맛 신경 쓸 필요 없이 엄마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뷔페. 닭다리나 전복을 양보할 필요도 없는 뷔페. 어디에서 뭘 먹어도 습관적으로 엄마는 집게나 가위, 국자 등을 들고 식구들에게 음식을 퍼주고 있다. 더 귀하고 더 맛있는 음식일수록 다른 식구에게 퍼준다. 뷔페식당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을 먹는 엄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는 할머니로 불리는 엄마를 보며 내 할머니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할머니는 생전에 가끔 담배를 피웠다.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숨어서 피웠다. 제발 숨어서 피지 말고 그냥 피시라고 아버지가 아무리 말해도 할머니는 대놓고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늘 “이제 안 핀다.”고 하며 흡연을 숨기려 했다. 할머니들에게 ‘나’는 있었던가. 취향이란 것을 누렸을까. 집안에서 사치한다는 평을 듣는 할머니가 한 분 있다. 사치하다는 그 할머니조차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장과 술을 담가 주변에 나눠준다. 난 그 할머니가 과하게 욕을 먹는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남을 위해 먹거리를 퍼주는 건 당연한데, 자기 자신을 위해 옷을 사면 사치해진다.
여자의 입은 ‘2등 입’이라 말도 없어야 하고 덜 먹어야 한다. 입은 묵묵하고 손은 바쁘던 할머니들. 엄마 쪽 할머니와 달리 아빠 쪽 할머니는 다행히도 입이 묵묵하진 않았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잘하고 ‘아는 소리’도 잘했다. 사람들은 ‘문자 좀 쓰시는’ 어르신이라고 했다. 좋게 말할 때는 문자 좀 쓰면서 이야기를 잘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노인네가 너무 아는 척한다고도 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문자 쓰고 말 많은’ 할머니에 대한 시선도 성차별이다. ‘늙은 여자’는 현자의 이미지를 얻지 못한다.
20여 년 전 한 달 동안 병원에서 할머니 병수발을 든 적 있다. 변기에 할머니의 대변을 버리던 순간 역하게 올라오던 그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 역한 경험은 할머니에게 밥도 못 해준 미안함을 아주 약간 감해줬다. 할머니의 배설물을 처리한 뒤 컵라면을 사서 휴게실에서 혼자 먹는데 식탁과 화장실의 거리가 생각보다 참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시신 기증으로 모든 것을 주고 갔다. 할머니의 몸은 누군가의 삶을 위해 쓰였을 것이다. 살아서는 평생 가족을 먹이고 죽어서는 낯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몸을 제공했다.
수년 전 낙산사 가는 길에 사마귀를 옮기는 개미 떼를 본 적 있다. 수백, 혹은 수천 마리의 개미가 바글바글 모여서 죽은 사마귀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상여를 지고 이동하는 장례 행렬 같았다. 어쩌면 그 사마귀는 개미들의 만찬 식탁에 놓일지도 모른다. 장례식인지 만찬 회동인지 알 수 없는 그 개미 떼의 행렬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먹는다는 건 매번 장례식이구나. 내 식탁은 늘 다른 누군가에게는 장례식인 셈이다. 내 삶은 누군가의 죽음을 흡수하며 지탱한다.
집에서는 부엌이 바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대가리가 잘린 채 눈을 희번덕거리며 인간의 먹이가 된 물고기, 부위별로 이름 붙여진 채 살덩이로만 존재하는 동물들. 할머니들은 여전히 그 공간의 싱크대 앞에 서 있다. 남성의 부엌 진출이 더딘 사회에서 집안과 집 밖에서 이중 노동을 껴안고 사는 여성들은 할머니들이 없으면 어찌 살까 싶을 정도다. 사회의 진보 속에서 여성의 노동은 다른 여성에게 전가된다. 여성 노인의 집안 노동은 부뚜막에서 싱크대로 이동했다.
옛부터 하대하는 공간이었지만 부엌은 언제나 중요했다. 오늘날과 같은 난방 시설이 갖춰지기 전 부엌은 음식뿐 아니라 집안의 난방을 담당하는 역할도 했다. 부엌은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자 불을 다루는 공간이다.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은 불의 신으로도 불린다. 곧 집안의 공기를 덥히고 사람의 마음도 덥히는 공간이다. 부엌은 집의 심장이다. 가족 구성원이 골고루 드나드는 공간이어야 관계의 순환이 원활하다. 어느 한 사람이 이 부엌이라는 공간에 과하게 머물고 있다면, 식탁에 편히 앉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집안의 관계는 어디에선가 막히기 마련이다.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의 권리를 생각하는 정치적인 식탁은 누구든 환대해야 한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동물적 존재에서 말하는 권리를 가진 정치적 인간으로, 나아가 타인과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랑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