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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밀도가 높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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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종종 하는 질문. “오늘 하루 중에 재미있었던 일 하나만 이야기 해줘.” 중학생이 되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재밌는 일 없었는데”란 대답이 잦아졌다. (2018. 06. 20)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내 일상은 단순하다. 이른 새벽 일어나 서재에서 책을 읽다 보면, 아내와 딸이 차례로 출근하고, 등교한다. 병원 진료 시작 시간이 오전 10시인지라, 우리 식구 중에서 내가 가장 늦게 집에서 나온다. 아침에 혼자 남아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널고, 진료가 없는 수요일 오전은 집안 청소를 한다. 이 일을 모두 끝내고 출근하면, 이후부터는 하루 종일 상담을 한다. 저녁 무렵 진료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거나, 병원에 남아 책을 읽다가 중학생 딸아이의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퇴근한다. 학원 공부를 끝낸 딸을 차에 태워 집으로 데리고 오면 내 하루 일과도 끝난다.

 

늦은 밤 학원가는 불야성이다. 셔틀버스와 학부모의 차가 서로 엉켜 정체되기 일쑤다. 학원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추려면 미리 서둘러야 한다. 지친 표정으로 학원에서 나온 딸을 차에 태워 집으로 오는 늦은 밤, 차 안은 심야 상담소가 된다. 사춘기 딸과 중년 아빠가 도란도란 대화 나누기에 이만큼 좋은 분위기는 없다.

 

딸은 수학 학원에서 내준 숙제가 많아서 주말에도 제대로 못 쉰다고 푸념을 한다. 워너원이 볼빨간사춘기에게 음악방송 1위 자리를 내줘서 속상하다고 했다. 친한 친구가 엄마와 싸웠다며 짜증을 내기에 자기 나름의 조언을 해줬고, 담임선생님께 칭찬 받고 싶어 애쓰는데 뜻대로 잘 안 된다며 답답해한다. 친구들과 함께 간 코인 노래방에서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다가올 기말 고사 걱정에 예민해질 때도 있다. 여중생의 정신세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구나” 하며 맞장구를 친다. 딸은 하소연하고 싶은 것이 많은지 계속 재잘댄다.

 

딸에게 종종 하는 질문. “오늘 하루 중에 재미있었던 일 하나만 이야기 해줘.” 중학생이 되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재밌는 일 없었는데”란 대답이 잦아졌다. 중년이 된 나야 무탈하게 보낸 심심한 하루에 더 없이 만족하게 되었지만, 한창 즐거워야 할 여중생이 “재밌는 일 없었어”라고 할 때마다 안타까웠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 동안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분명 있었을 텐데... 공부에 지치고 숙제에 눌려 잠시 잊은 것이리라. 그렇게 이해하려고 한다.

 

정신과 의사 아빠라고 특별한 교육 비법이 따로 있지 않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문학가이며 석학인 나카이 히사오가 “가정과 학교를 불문하고 교육이라는 건 특히 강박성이라는 꽉 죄는 옷을 능숙하게 입도록 하는 접근 방식들로 가득 차 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아이들의 자연스런 본성을 억누르는 교육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말 했다가는 세상 물정 모른다고 아내가 타박할 테니 그냥 입 다물고 있을 수밖에. 그래도 딸에게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식의 밀도보다 추억의 밀도가 높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예상치 못 한 일로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았다. 포기하고 싶었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견디고 조금이라도 전진할 수 있었던 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내게 남긴 추억의 힘 때문이었다. 어릴 때 치과 의사이셨던 외할아버지의 병원에 놀러 가 반짝이던 금속 의료 기구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내가 그곳에서 나오지 않으려 하면 세발자전거에 나를 태워 밀어주며 한참을 같이 놀아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남김없이 내 품에 안겨 주시려 했던 당신. 반찬투정이라도 하면 따뜻한 두 손으로 감싸며 달래주시던 기억. 외갓집 안방에서 외할아버지의 양반 다리 속에 앉아 티브이를 함께 보던 그 포근한 느낌.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때의 체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돌아가셨지만, 삶의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릴 때마다 지금도 나는 외할아버지와 대화를 한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물으면 답을 주실 것만 같아서.

 

과연 중학생 딸의 마음에서 나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꼭 내가 아니라도, 따뜻한 사람을 곁에 두고, 그들과 함께 한 추억이 많은 어른으로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힘들 일이 많겠지만, 꿋꿋이 이겨낼 수 있도록 추억의 밀도가 높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어른들은 여러분의 교육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어린 시절에 간직했던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이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하게 되면 한평생 구원받게 됩니다. 그런 추억들 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게 된다면, 그 추억은 언젠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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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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