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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인생을 사랑하고 즐길 권리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
영화가 시작되면 레이먼드 브릭스가 나와 ‘극적인 일도 없었고 이혼도 하지 않았던’ 평범한 부모를 ‘그림책을 통해 기억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살아 있다면, 부모가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니’라고 타박할 수도 있겠다면서. (2018. 05. 31)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자주 포옹하고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노동자 계급의 부부는 정치에 대한 견해도 다르고 세속적인 욕망의 농도도 같지 않고 아들에 대한 기대도 조금 달랐지만 일상의 리듬을 전혀 훼손하지 않았다. 함께 차를 마시고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의견을 나누어도 다투지 않았다. 서로 존중했다. 자신에게 각자 주어진 ‘상대방을 사랑할 의무’에 대해 충실하고 ‘인생을 즐길 권리’를 만끽했다. 이 부부의 이야기를 ‘한 편의 그림 같다’는 수사로 쓰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바로 그림이 되어버린 애니메이션 <에델과 어니스트>의 이야기니까.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고전이 된 그림책 <눈사람 아저씨>의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가 부모의 일생을 그린 그래픽노블 <에델과 어니스트>. 이 원작을 바탕으로 로저 메인우드 감독이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었다. 사실화풍이 아닌데, 세밀화라고 할 수도 없는데 디테일이 뛰어나고 꿈꾸는 듯 부드럽다. 벽돌 하나에도 당시 풍경이 스며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감각이 살아 있는 그림들. 174명 영화 스태프의 실제 수작업이 이루어낸 9년 제작의 명작이다.
사실 레이먼드 브릭스의 단편 애니메이션 <눈사람 아저씨>를 겨울이면 찾아보곤 했던 나로서는 그 감수성을 되살리는 묘한 기시감과 향수에 젖게 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따뜻하고 섬세한 기운의 <눈사람 아저씨>를 또 보고 싶다, 당장!
우유 배달부 어니스트와 가정부 에델이 사랑에 빠지고 결혼, 출산, 양육, 사별을 겪는 40년 이야기. 에델과 어니스트의 기록은 그 시대 상황까지 그대로 반영한다. 1928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두 사람의 소박한 가정은 유럽 현대사를 비껴갈 수 없다.
경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정권 교체 등 국제 정치사회 역학의 문제가 고스란히 이 가정을 변화로 이끈다. 또 산업혁명으로 처음 TV가 나오고, 전화기가 집에 들어오며, 자동차를 개인이 소유하게 되는 과정은 유머러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영화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에델과 어니스트 부부는 노산으로 어렵게 얻은 유일한 아들 레이먼드가 노동자계급 집안에서 드물게도 시험에 합격해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받게 되자 흥분감으로 들뜬다. 사고도 치고 반항하는 청소년기를 거친 아들이지만 에델의 자부심은 그대로다. 그 자부심은 미술학교로 진학하겠다는 아들의 의지에 무너져내리지만,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성숙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예술하겠다는 자식에게 경제력 없는 미래가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그제나 이제나 시공간을 건너뛰는구나. 풉, 웃음 나오는 대목.
영화가 시작되면 레이먼드 브릭스가 나와 ‘극적인 일도 없었고 이혼도 하지 않았던’ 평범한 부모를 ‘그림책을 통해 기억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살아 있다면, 부모가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니’라고 타박할 수도 있겠다면서.
노동자의 작은 벌이와 모기지론으로 구한 집안의 살림살이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도 이 가정의 행복은 유지된다. 심지어 나치의 런던 침략으로 방공호에서 밤을 보내는 날에도 인생은 부정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방독면을 공짜로 쓰고 싶다면 빌어먹을 공습경보에 참여하세요”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어니스트와 아들 레이먼드를 보면서 나는 눈치챘다. 이들은 세상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을 가정하고 탄식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일어난 일은 그렇고,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는 태도.
에델과 어니스트가 세상을 떠난 후, 레이먼드가 직접 씨를 심어 자란 커다란 배나무를 아내와 함께 바라보며 영화는 끝난다.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오늘 배나무를 심었던 ‘에델과 어니스트’의 아들 레이먼드 덕분에 나는 작고 위대한 삶을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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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에델과 어니스트, 사랑할 의무, 인생을 즐길 권리, 로저 메인우드 감독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