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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찾아 삼만 리, 베트남 전쟁터를 누빈 순이의 노래

<님은 먼 곳에> 냉전시대의 피해자였던 베트남, 그리고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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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이 끝난 후 한국사회는 이들 참전 군인에 대한 어떤 치유프로그램도 마련하지 않았다. 나라가 가라고 해서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해 육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고 돌아온 병사들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2018.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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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님은 먼 곳에>의 한 장면

 

 

최근 한반도는 지난 세기 이데올로기 대립이 남긴 비극적 분단과 반목을 종식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정착시키기 위해 분주하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무의미해진 21세기에도 여전히 20세기 냉전시대의 상흔으로 남은 한반도의 분단을 전쟁이나 혼란 없이 평화롭게 해소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세기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국가들과 소련(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대립하며 세력을 겨루던 시대였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두 세력은 또 다른 세계대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놓고 갈등을 표출시키지는 않았지만 이면에서는 끊임없이 대립하였다. 이를 냉전시대라고 한다. 냉전시대 두 세력은 세계 각지에서 국지전이나 대리전을 일으키곤 했다. 대표적인 국지전 혹은 대리전이 바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즉 한국전쟁이다. 양상이 조금 달랐지만 베트남전쟁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는 이데올로기로 분단되어 오늘날까지 냉전시대의 상징으로 남아 있지만 베트남은 끈질긴 전쟁 끝에 통일국가를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에 미국의 요청으로 참전했다.


영화 <님은 먼 곳에>(2008년 작, 감독 이준익)는 베트남전쟁의 한가운데에 들어간 위문공연단의 가수 순이의 눈을 통해 지난 세기 냉전시대가 만든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의 무리수, 베트남 전쟁

 

베트남전쟁은 공식적으로는 1964년에 시작되어 1975년에 끝났다. 그러나 이전부터 베트남은 강대국의 이권과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다.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독립국이었던 베트남은 19세기 제국주의 침략이 과열되던 1883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의 착취에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런 가운데 2차 대전이 일어났고 프랑스 본토가 독일에 점령되자 동남아시아 지역의 프랑스 식민지를 일본군이 접수하면서 잠시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일본이 물러나면서 호치민(胡志明 1890~1969)을 중심으로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켰고, 베트남 독립을 선언한 뒤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세웠다.


프랑스는 2차 대전 전 상황을 고집하면서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며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1946년부터 8년간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이어졌다. 이를 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의 저항은 끈질겼고 강력했다. 프랑스는 독립을 원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열망을 이겨낼 수 없었고 1954년 결국 물러났다. 프랑스는 패배는 인정했지만 베트남에 남은 프랑스 세력의 퇴각기간을 벌기 위해 제네바협정을 맺었다. 일단 프랑스 관련 세력을 전부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위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나누었다. 원래 협정은 프랑스의 퇴각이 마무리되는 2년 후인 1956년 남북 베트남 총선거를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협정을 먼저 깬 쪽은 남베트남이었다. 당시 베트남 사람들은 북베트남 정권과 호치민을 지지했다. 프랑스가 퇴각한 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미국이 응오딘지엠(吳廷琰, 1901~1963)을 남베트남 통치자로 세우면서 분단을 고착화시켜버린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의 의사보다는 냉전시대 강대국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분단이었다.


그러자 공산화로 베트남 통일을 바라던 사람들 중 남베트남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라는 단체를 세우고 응오딘지엠 정부를 상대로 게릴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열대밀림 지역인 베트남의 지형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하며 남베트남 정부군과 주둔해 있던 미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들을 일명 ‘베트콩’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들을 후원한 것은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이었다.


호치민의 주도로 북베트남이 국가적 안정을 차근차근 이루어갈 때 남베트남은 군사쿠데타가 반복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등 미국이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태가 지속되었다. 남베트남이 무너지고 북베트남의 주도로 베트남이 통일된 후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에 극도로 위기감을 느꼈던 미국은 1964년 무리수를 둔다.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미국은 1964년 8월 4일 통킹만에 정박한 미국함대를 북베트남이 먼저 공격해왔다고 발표하고 북베트남에 대한 전쟁을 공식화했다. 훗날 이 사건은 미국이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가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북베트남에 대해 선제공격을 한 것은 미국이었다. 이로써 2차 인도차이나전쟁, 통칭 ‘베트남전쟁’이 시작된다. 미국은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다. 그리고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미국 단독으로 베트남과 싸운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세계에 파병을 요청했지만 응하는 나라가 별로 없었다. 특히 유럽의 반응은 차가웠다.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은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등에 파병을 요청해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한국은 32만 명이 참전했다. 다른 나라가 파병한 군인을 모두 합친 수의 3배로, 한국은 미국에 이어 가장 많은 수의 군인이 참전한 국가가 되었다. 베트남전 파병은 한국군 사상 처음으로 해외에 군대를 내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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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파병 청룡부대 환송식.(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군의 베트남 파병

 

영화 <님은 먼 곳에>의 배경이 되는 1971년은 베트남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때였다.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순이(수애 분)는 대학생 남편에게 시집온 농촌의 아낙네이다. 그녀의 대학생 남편 상길(엄태웅 분)은 빨리 대를 이를 손자를 보고 싶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사랑하지도 않는, 아니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 순이와 결혼한 뒤 아내와 어머니는 고향집에 두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1971년 한국 상황은 박정희의 독재가 심화되어가고 도시는 베트남 특수와 개발독재가 부르짖는 왜곡된 근대화로 빠르게 변해갔지만, 새마을운동이 막 시작된 시골은 여전히 남아선호와 남존여비에 젖은 구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순이는 그런 시대를, 여자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려니 하고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 여대생과 연애질을 하다 차이고 홧김에 베트남전에 자원해서 나가기 전까지는, 그녀는 사랑이 뭔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몰랐고 알 생각도 못 한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이 “니 내 사랑하나?”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마음조차 알지 못했기에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외아들이 전쟁터로 나가자 몸져누운 시어머니를 대신하여 남편을 찾아 베트남으로 간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어머님이 가라고 해서 가는 순이의 모습은 머나먼 전쟁터로 끌려간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군인의 베트남 파병은 베트남전쟁이 시작된 해인 1964년 9월부터 1973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까지 총 8년 5개월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베트남에 집중적으로 군인을 파병한 것은 1960년대 말이었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71년은 미국 내 반전 여론으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손을 떼어가던 중으로 한국군도 서서히 철수를 할 때였다. 


최초의 베트남 파병은 병원병과 태권도 교관을 파견하는 정도였지만 미국이 파병에 대한 보상으로 브라운각서를 제시함으로써 파병 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브라운각서는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브라운이 대통령 박정희를 방문하여 한국군 증파를 요청하면서 내건 조건이었다, 주요 골자는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의 안보를 증진시키고 베트남전에 소요되는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데 한국을 참가시켜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파병 비용과 장병 처우 개선 등을 미국이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은 베트남전쟁으로 갑자기 돈이 들어오고 물자가 풍부해지는 일시적인 호황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를 ‘베트남 특수’라고 부른다. 지난 세기 세계는 남의 불행이 기회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무감하게 넘기거나 그 혜택을 누렸다. 한국전이 벌어졌을 때 주변국이 ‘한국 특수’를 맞아 기회를 누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베트남 파병은 결국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내보내는 일이었다. 베트남전은 그저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참혹한 전쟁터에 내 아들, 내 남편, 내 형과 아우를 내보낸 전쟁이었다. 영화에서처럼 수많은 순이의 남편들이 베트남전에 나가 생사를 달리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전사 5000여 명, 부상 1만 5000여 명의 큰 희생을 치렀다. 미군이 뿌린 고엽제 후유증으로 오늘날까지 고통 받는 참전 군인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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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에 참전 중인 한국군.(출처: 국가기록원)

 

 

전쟁 특수에 대한 기대를 가리는 명분으로 우리나라의 베트남전 참전은 우방인 미국과 남베트남을 돕는다는 것이었지만 이미 세계적으로 베트남전 자체가 미국이 오판한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국제적으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미군과 함께 베트남에서 적이 아니라 양민을 학살한 끔찍한 일을 저지른 부대도 있었다.

 

미국은 1960년대 말 엄청난 화력을 베트남에 쏟아 부었지만, 결코 북베트남을 이기지 못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끈질기게 저항했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때로는 미국이 놀랄 만큼 큰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거세져갔고 전 세계는 베트남 국민이 원치 않는 남베트남을 지키려는 미국을 비난했다. 베트남의 운명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맡겨두라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팽배해졌다. 미국은 결국 1969년부터 미군을 서서히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1972년 여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정전 협상이 재개되었고,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파리평화협정으로 60일 안에 모든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한국 군대도 1973년 3월 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의 철수 후 남북 베트남은 계속되는 내전을 겪다가 1975년 4월 북베트남이 대규모 공세를 벌여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이후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패배한 유일한 전쟁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 전쟁이 미국 사회에 가져다준 충격은 컸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이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고, 세계경찰을 자처했던 미국의 검은 이면이 베트남전을 통해 드러나면서 미국 내의 정서적 혼란도 커졌다. 그래서 미국은 베트남전 이후 꾸준히 당시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베트남전에 가장 많은 숫자의 군인을 참전시켰다. 그들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그저 나이가 되어 징병된 한국의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 베트남전이 끝난 후 한국사회는 이들 참전 군인에 대한 어떤 치유프로그램도 마련하지 않았다. 나라가 가라고 해서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해 육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고 돌아온 병사들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베트남전으로 입은 고엽제의 후유증에 대한 보상도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오랫동안 입막음 되어 전쟁이 끝난 지 25년도 더 지난 1999년에 와서야 이슈가 되었다. 최근 베트남 파병과 관련하여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이 장병들의 급여를 빼돌렸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이제는 노년이 된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이 겪어낸 전쟁 후유증은 이미 통일된 나라 베트남 사람들이 겪은 고통보다 더 클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만난 순이는 남편을 보자마자 사정없이 뺨을 후려친다. 그것은 아마도 전쟁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자신이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더 이상 순종적이지 않은 그녀가 의미 없는 전쟁에 영문 모르고 끌려와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었던 수많은 한국 장병들에게 왜 이 전쟁에서 희생되어야 하는지 따지라고, 자각하라고 후려친 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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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이화여자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 『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 『천추태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한국사 영화관』 등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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