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현성의 어쿠스틱 노트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
기타리스트 샘 리
내게는 스튜디오에서 헤드폰을 쓰고 연주하는 샘 리가 제일 멋지지만 영상 속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모습도 꽤 어울려 보였다. (2018. 05. 16)
사진_임종진
1995년 샘 리가 한국에, 그러니까 강남의 스튜디오에 등장했을 때 작곡가와 엔지니어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제작자들은 그가 그들이 원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1990년대 중반은 R&B음악이 대세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이기찬, 양파 등 젊은 R&B 가수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가 등장하자 기존의 연주자들은 긴장했다. 미국에서 직접 배우고 익힌 리듬감과 그루브는 연습으로 따라잡기 힘든 것이었다. 또한 팝, 라틴, 흑인음악, 퓨전재즈 등 거의 모든 장르의 연주에 능란해서 음반 관계자들은 남들보다 빠르게 그를 섭외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는 어렵지 않게 한국 음악 시장에 정착했는데, 한마디로 꼭 필요한 시기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왔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의 그의 삶은 순조로웠지만 이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음악을 포기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아내와 아이가 있었지만 돈을 벌지 않고 신용카드를 긁어 가며 2년 가까이 자발적 백수로 살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생계를 위해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한 환멸 탓이었다. 지난날 그는 뉴저지와 시애틀 등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바에서 연주하곤 했다. 80년대 말, 한 달에 3~4000천 불 정도를 벌었으니 수익은 꽤 컸다. 하지만 밤이면 술 취한 손님들과 아가씨가 실랑이를 벌이는 곳에서 연주하는 일이 즐거울 수는 없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기에 밤마다 그곳에서 수 년 동안 기타를 쳐야 했다. 어느 날 그는 그런 생활에 진력이 났다. 음악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진짜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음악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십 대 초반, LA에서 전도유망한 연주자였던 그는 MI(Musician’s Institute, 미국의 유명 음악학교)에서 수여하는 Best Player Award에 선정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졸업하고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이 되는 일은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장벽이었다. 그는 기타리스트를 찾는 오디션을 여러 번 봤지만 거푸 떨어졌다. 그 이유는 그의 연주력보다 신체적 장애에 있었다. 성격도 좋고 실력도 충분하지만 장거리 투어가 많은 미국 밴드들의 특성상 목발이나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는 신인 연주자를 팀에 합류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그이지만 그 마지막 벽만큼은 넘어설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꿈이 좌절될 수도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끔찍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함께 음악을 배웠던 동료들, 고등학교 시절 그루브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준 윌리엄 케네디(William Kennedy, 그룹 옐로우 재킷의 드러머로 진열장 가득 그래미상을 수집하게 된다.), MI에서 경쟁했던 기타리스트 프랭크 갬발(Frank Gambbale, 칙 코리아 밴드의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 오스카 카타야(Oscar Cartaya. 스파이로 자이라의 멤버) 등이 자신의 실력과 노력에 합당한 기회를 부여받으며 세계적인 연주자로 성장하는 동안 그는 조금 다른 자리에서 기타를 쳐야 했다. 사람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수 없을 때, 그러면서도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가장 불행하다. 그는 음악도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부정하며 무기력하게 보내던 어느 날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는 한국에 가기로 마음먹었고, 긁을 대로 긁은 신용카드는 비행기 티켓 한 장을 겨우 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 남아 있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그는 연주자로서 누구보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왔다. 한국 최고의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명성을 떨치며 리듬기타의 신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최근에는 직접 집필한 기타 교본을 출간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독집 음반을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9년 EBS 음악방송 〈스페이스 공감〉에 단독으로 출연했는데 관객과 소통하며 위트 있게 공연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기타를 연주하고 자신의 음악 인생을 들려주는 그는 영락없이 한 분야의 대가,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사진_임종진
실제로 요즘 그는 다양한 경로로 음악 선생님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SNS상에서 만오천 명의 팔로워에게, 유튜브 채널로 일반 대중에게 그만의 연주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연습법과 영업 비밀에 가까운 노하우를 술술 털어놓는다. 그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기술과 철학을 전파하는 것은 다음 세대가 더 나은 음악적 토대 위에서 활동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처럼 음악 잘하는 나라들은 자기만의 사운드가 있거든. 다양한 장르의 세계적인 밴드들이 있고.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왜 우리만의 사운드가 없는 걸까, 그게 늘 아쉽더라고. 외국 친구들한테 한국에 이런 깊은 음악도 있어, 이게 우리 사운드야, 하고 들려줄 음악이 내 생각엔 아직 없는 것 같아.”
지금의 십 대, 젊은 세대가 더 창의적이고 과감하게 음악에 뛰어들어야 우리만의 사운드, 위대한 밴드와 뮤지션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시행착오를 줄여 주기 위해 누군가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는 그것이 자신의 역할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내게는 스튜디오에서 헤드폰을 쓰고 연주하는 샘 리가 제일 멋지지만 영상 속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모습도 꽤 어울려 보였다. 그 자리 역시 그가 있어야 할 곳이고 그 혜택으로 우리는 더 깊이 있고 다양한 음악들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샘 리(기타리스트) _ 리듬 기타의 신, 최고의 세션 연주자이자 솔로 아티스트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두 살에 소아마비 판정을 받았고, 10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L.A의 음악학교인 MI(Musician’s Institute)에서 수학했다. 그해의 졸업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연주자에게 수여하는 Best Player award를 수상하면서 MI 최초의 동양인 강사가 되었다. 1995년부터 한국에서 활동했으며 R&B, 재즈, 라틴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능통한, 우리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연주자이다.
<소원>, <헤븐> 등의 노래를 불렀다. 산문집 『당신처럼 나도 외로워서』를 발표했고, 현재 음악과 글쓰기를 병행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