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승한의 얼굴을 보라
김정은의 웃음 - 멀다고 하면 안 될
너무도 멀었던 거리를 단숨에 넘어서는 웃음의 파괴력
아직 마냥 모든 걸 낙관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올 가을의 재회를 약속하며 한껏 웃어보인 김정은 위원장의 얼굴을 조금 더 오래 감상하고 싶다. (2018. 04. 30)
1984년생들은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첫 세대다. 그들은 6학년이던 1996년까지 ‘국민학교’를 다니다, 그 명칭이 ‘초등학교’로 개칭된 1997년 2월에 졸업했다. 84년생들이 ‘국민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교는 어린 아이들에게 끈질기게 반공교육을 했다. 그럴 법도 했다. 서울 불바다 발언이 94년, 미국이 영변 핵시설을 폭파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로 한반도가 전쟁 5분전의 상황에 놓여있던 것도 94년, 상황이 일순에 전환되어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지려 했던 것도 94년이었다. 섣불리 반공교육을 그만 두기에는 남북 관계가 어제 다르고 오늘이 또 다른 세월이었다. 그랬으니,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때 84년생들이 받은 충격은 어땠으랴. ‘국민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반공 웅변대회를 나가 속내가 시뻘건 ‘북괴’를 규탄하던 이들이, 정규교육 12년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얼싸안고 인사를 나누는 걸 지켜본 거다. 그야말로 세계관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경험이었던 거지.
그 충격을 기억하고 있던 한국의 수많은 1984년생들에게, 동갑내기 김정은 위원장의 웃음은 뭐라 말하기 힘든 기묘한 인상을 안겨준다. 분명 몇 개월 전까지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트럼프와 맞서 트래쉬 토크를 일삼던 미치광이 독재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와 군사분계선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환담을 나눈다. 역대 북한 최고 지도자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 영토에 내려와 연설문을 낭독한다. 미사일 발사와 평양냉면을 소재로 농담을 던진다. 분명 바라는 바가 있어서 수행하는 고도의 정치일 테니 마냥 감상적으로 보면 안 된다고 스스로 몇 번을 다짐해 봐도, 이 초현실적인 광경 앞에서 울컥하지 않기란 쉽지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약식으로 진행된 의장대 사열을 아쉬워하며 후일을 기약했지만, 사실 의장대야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이미 두 정상이 웃으며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는 압도적인 광경을 전 세계에 보여줬는데, 의장대를 누가 신경이나 썼겠는가.
“멀리 온… 멀다고 말하믄 안 되갔구나?” 평양 옥류관에서부터 셰프들과 제면기를 공수해 평양냉면을 준비한 김정은 위원장은, 이 냉면을 멀리서부터 가져왔노라 말하려다 금방 제 말을 거두며 동생 김여정 부부장에게 농을 던졌다. 그 날 전국의 평양냉면 집은 기분이라도 내보고 싶었던 이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결코 멀다고 할 수 없으나 사실 너무도 멀었던 그 거리를 단번에 성큼 넘어서 함께 웃는 그 기분을. 아직 마냥 모든 걸 낙관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올 가을의 재회를 약속하며 한껏 웃어보인 김정은 위원장의 얼굴을 조금 더 오래 감상하고 싶다. 평범한 우리 장삼이사들도 너무 멀었지만 결코 멀지 않은 평양 옥류관 냉면을 맛 볼 그 날을 상상하면서.
관련태그: 김정은 위원장, 남북 정상회담, 평양냉면, 문재인 대통령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