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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로망스’ 듣기

끌려갈 수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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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기타를 사주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학창시절 한 페이지를 찢어 기타와 같이 선물한 거였을까? 나는 몰랐다. (2018. 04. 19)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음악은 타임머신이다. 언제라도 그것과 익숙하게 닿아 지내던 시절로 데려간다. 순식간에.

 

기타로 연주하는 ‘로망스’가 흘러나오면, 어느 큼직한 손이 내 뒷덜미를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가는 것 같다. 뒤로, 뒤로. 끌려가서 기어이 내가 도착하는 시간과 장소는 스무 해도 전, 지방 소도시의 텅 빈 카페 안이다.

 

손님이 없는 카페에 네 식구가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나는 카페 구석에 놓인 기타를 발견하고는 별 생각 없이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얘기한다. 내 말에 젊은 아버지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버지가 카페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고는 어머니와 나(고등학생), 남동생(초등학생)이 앉아있는 자리로 기타를 들고 온다.

 

“이 기타는 클래식 기타다. 통기타가 아니야.”

 

아버지는 초보자들이 처음 연습하는 곡이라며 ‘로망스’를 연주해 보인다.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선율이 아버지의 손가락을 통해 흘러나온다. 나는 약간 얼이 나갈 만큼 감동하지만, 시큰둥한 척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얼마 뒤 아버지는 내게 세고비아 통기타를 사줬다.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 건 나지만 그냥 해본 말이었기에, 정작 기타가 생기자 난감했다. 나는 기타를 만지는 척하다 일주일도 채 안 되어 멀리 했고, 기타는 장롱 위에서 먼지를 모으는 그릇으로 전락했다. 아버지는 아쉬워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척들과 식당에 들렀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고기를 구워먹었다. 슬픔을 밀어내려고 그랬는지,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메워지지 않는 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모두 쌈을 입에 욱여넣으며 씹고 이야기하고 웃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아흔을 넘기셨으니 호상이다’, ‘한우를 배가 터지도록 먹어보는 건 처음이다’, ‘남은 어머니가 걱정이다’ 이런 말들이 오갔다. 그때 고모부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애 고등학교 때 전자기타 안 사주면 학교 안 가겠다고 해서 내가 사줬잖아.”
 “학교 가라고 기타를 사줬더니 기타를 들고는 아예 도망가버렸지.”
 “누가 아니래. 그 애 속 썩인 거 말로 다 못하지.”
 “그래도 나는 그 애에게 잘했다.”
 “어려서부터 걔는 예쁨을 많이 받았잖아.”

 

전자기타를 안 사주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쓴, 철부지 막내아들을 나는 모른다. 몰랐다. 모르는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려보니 아득했다. 아직 삶이 상한 데 없이 싱싱했을 아버지의 학창시절.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그 길로 밤무대 연주자가 된 어린 아버지.

 

내게 기타를 사주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학창시절 한 페이지를 찢어 기타와 같이 선물한 거였을까? 나는 몰랐다.

 

기타로 연주하는 ‘로망스’가 흘러나오면, 언제라도, 내가 질질 끌려갈 것을 안다. 가서 결국 어디에 앉게 될지 안다. 그곳에는 아직 살아있는, 젊은 아버지가 식구들을 앉혀놓고 기타로 ‘로망스’를 연주할 것이다. 미리 알기에, 음악과 슬픔이 같이 도착한다. 지금도 나는 ‘로망스’를 들으며 질질 끌려가고 있다. 소용없다. 끌려갈 수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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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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