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교석의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빵 맛의 새로운 세상
발뮤다, 더 토스터
최첨단 가전이라고 꼭 냉장고랑 대화해야 하는 건 아니다. 더 토스터는 오히려 작동 단계를 더 늘렸다. 그러나 잘 구워진 빵이 아닌, 맛있는 빵을 맛볼 수 있다는 데 이정도 편의는 얼마든 양보할 수 있다. (2018. 04. 03)
발뮤다
무슨 일이든 새롭게 시작하면 루키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살림을 처음 마련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과도기적 현상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조잡하고 잡다한 것들을 하나둘 사 모으는 거다(물론, 애벌래가 변태한 것처럼 입었던 옷을 허물처럼 그대로 바닥에 벗어둔다거나, 개수대에 설거지 거리를 두 끼 치 이상 쌓아두고 사는 사람들은 해당 사항이 없을 수도 있겠다). 형편이 여유로운 사람이야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되는 물건을 사니 취향의 문제 정도만 남겠지만 대부분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미세플라스틱과 같은 환경 문제에 일정 부분 책임을 지게 된다.
특히 신혼부부들은 금액 대비 심리적 만족이 커서 그런지 소형 가전이나 주방 가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마련한 제품들은 대부분 처음 몇 번만 사용하고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거나 수납공간만 차지하고 들어앉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런 소비의 퇴적이 미니멀리즘이 유행할 수 있던 토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중에서도 토스트기는 살면서 딱히 필요를 못 느꼈지만 사두면 괜히 많이 쓸 것만 같은 대표적인 가전이다. 주변에 살림이나 쇼핑과 관련한 조언을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스트기 구매부터 말렸다. 언제 먹을지 모를 식빵 한 쪽 굽겠다고 고안된 전열기구가 얼마나 불용한 존재인지에 대해 나는 꽤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근안이 물어도, 지나 해스펠이 물어도 내 대답에는 변함이 없을 만큼 확고했다. 발뮤다 ‘더 토스터’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발뮤다
더 토스터는 일본에서 토스터로 빵을 굽는 행위의 폭을 확장하면서 발뮤다의 운명을 바꿨을 뿐 아니라 토스트기에 대해 강경했던 내 신념 또한 재정립했다. 죽은 빵도 살려주는 토스터라는 문구로 유명한 더 토스터는 토스트기의 기존 개념에서 벗어난 오븐식 토스터다. 사실 대단한 기술은 아니다. 미니 오븐에 스팀 기능을 추가한 것인데, 미니오븐을 토스터기라고 우기는 인식의 전환이 핵심이다. 기존 토스터기가 열선으로 빵을 바짝 굽는 게 전부였다면(그래서 빵이 건조하고 거칠어졌다면) 발뮤다는 겉은 바싹하면서도 속은 촉촉하고도 쫄깃한 식감을 선사하는 새로운 도구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여기엔 탄생 설화가 있다. 테라오 겐 대표는 젊은 시절 뮤지션으로 생활하며 해외 생활과 여행을 많이 다닌 일종의 히피였다. 바야흐로 17살, 지치고 외롭고 주린 여정 중에 스페인 남부 론다 지방의 어느 동네 빵집에 이끌리듯 들어섰고, 그리고 그곳에서 인생의 빵을 맛봤다. 따뜻하고 촉촉한 빵을 베어 물자 외로움과 고단함이 단박에 날아갔다.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 그는 회사를 설립하고 토스터 개발에 착수했지만 번번이 난관에 빠졌다. 사내 바비큐 파티에서까지 그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추억의 빵맛을 찾기 위한 추적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추적추적 비가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빵맛에 습도가 끼치는 영향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집요하게 파고든 추억 여행 끝에 테라오 겐은 그토록 그리던 빵맛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더 토스터로 빵을 구울 때는 함께 제공되는 앙증맞은 개량 컵으로 5cc 가량의 물을 붓는다. 토스트, 치즈토스트, 바게트, 크루아상 등의 매뉴얼대로 작동시키면 각 빵 종류에 가장 적합한 얇은 수분막이 형성되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빵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스팀 기능을 쓰지 않아도 치즈를 녹이는 등의 간단한 오븐 요리가 가능하다. 해보진 않았지만 쿠키나 머핀 정도는 구울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2017년 버전부터는 모드조절레버로 조작할 수 있는 최저 온도를 160도에서 쿠키를 굽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170도로 아예 올렸다.
발뮤다
시니컬한 일군의 비평가들은 예쁘기만 한 비싼 제품이라고 평을 하기도 한다. 둘 다 틀린 말이다. 우선 세상의 기준이 달라졌다. 예쁜 것만으로도 값어치를 하는 세상이다. 프리미엄 시장이 확대되면서 가격보다 소비자 만족도가 중요해졌고, 가전도 인테리어 오브제로써의 가치가 중요해졌다. 제주도의 이효리 집이나 후암동의 아베크엘, 신사동의 식부관, 88브레드 같은 힙한 카페나 빵집에서 더 토스터를 괜히 심심치 않게 만나는 게 아니다. 그래서일까. 이마트몰에 따르면 올해 3월까지 더 토스터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다섯 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맛. 불행히도 식빵만으로 차이를 못 느끼지 못했다면 요즘 많이들 먹는 크루아상과 같이 버터가 공기를 품고 있는 페이스트리 제품이나 딱딱해진 크로크 무슈처럼 치즈가 들어간 빵을 소생시켜보길 권한다. 그럼에도 모르겠다면 굳이 빵을 따뜻하게 해서 먹을 필요가 없다. 나의 경우 계절식품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겨울철이면 집에 가져오는 길에 풀이 죽어버린 잉어빵을 되살리는 데 주로 사용한다.
바로 이 지점이다. 발뮤다의 브랜드 특성이기도 한데, 성능을 자랑하기보다 어떻게 즐거운 삶의 체험을 하도록 돕는 ‘도구’인지 보여주는 데 관심이 많다. 제품 패키지에 레시피북을 동봉해서 더 맛있는 빵을 즐기는 생활을 제안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최고의 빵맛을 즐길 수 있다는 체험의 가치를 제시한다. 스스로도 가전 회사라 부르지 않고, 실제로 이들을 밀어준 t-사이트나 츠타야 가전, 무인양품 모두 라이프 스타일 매장이다.
발뮤다는 일본 가전업계의 애플이란 별명을 갖고 있지만 본사 직원이 100명도 안 되는 중소기업이다. 우리나라와 대만을 제외하곤 제대로 된 해외 시장도 없다. 시장조사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거의 구매 경험을 토대로 미래 수요를 예측하는 시장 조사를 신뢰하지도 않고 하지도 않는다. 세상의 불편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일상생활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며 내가 만들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만든다는 테라오 켄 대표의 ‘스웩’ 넘치는 경영철학은 오늘날 요즘 사람들이 추구하는, 더 나은 경험을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관통했다.
최첨단 가전이라고 꼭 냉장고랑 대화해야 하는 건 아니다. 더 토스터는 오히려 작동 단계를 더 늘렸다. 그러나 잘 구워진 빵이 아닌, 맛있는 빵을 맛볼 수 있다는 데 이정도 편의는 얼마든 양보할 수 있다.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빵의 세계를 체험하길 바란다. 5만원 주고 사서 안 쓰느니, 30만원 내고 두고두고 행복해지길 바란다. 참고로 누설하자면 더 토스터는 발뮤다의 세계로 들어서는 열쇠다. 그 이후 벌어질 연쇄 소비 욕구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발뮤다에 있다.
푸른숲 출판사의 벤치워머. 어쩌다가 『아무튼, 계속』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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