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아빠, 만화 안 그리고 뭐해?
마누라는 그래도 제법 괜찮은 남편이다
그깟 흙 좀 먹으면 어때. 맛있으면 됐지.
“좋은 아빠시네요.” 그동안 애 담임선생님은 모두 예외 없이 같은 말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하셨다. (2018. 03. 28)
“웬일로 아버님이 오셨네요?”
매년 애 학교 학부모 상담을 받을 때마다 첫마디로 인사 대신 듣는 얘기다. 애가 올해 4학년인데, 그동안 애 담임선생님은 모두 어머님의 방문을 기대하셨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애 담임선생님은 모두 여자 선생님이었고, 마누라가 아닌 나의 방문이 놀랍다는 눈치였다. 학부모 상담 시간은 대개 오후 4시 무렵이고, 직장을 다니는 아버님들이 학부모 상담을 받으려면 월차를 쓰거나 일찍 퇴근해야 한다. 하지만 학부모 상담을 받으려고 월차를 쓰거나 일찍 퇴근하는 아버님은 거의 없다.
어머님의 방문을 기대했던 담임선생님과의 학부모 상담이 얼마나 어색한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른다. 텅 빈 교실은 왜 그렇게 좁고, 또 애들 의자는 왜 그렇게 작은지, 한두 번도 아닌데 나는 매번 안절부절못한다. 그건 담임 선생님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나는 어떻게든 그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려 담임선생님께 애의 평소 성격과 사소한 습관부터 친구 관계까지 속속들이 말씀드린다. 그럼 담임선생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씀하신다.
“좋은 아빠시네요.”
그동안 애 담임선생님은 모두 예외 없이 같은 말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하셨다. 마치 4학년 3반 권지홍 아버님은 ‘좋은 아빠’라는 내부 지침이라도 있는 것처럼. 학부모 상담을 억지로 간 것도 아니고, 자기 일로 충분히 바쁜 마누라에 비해 시간이 남아도는 내가 가야겠다 싶어 자처한 건데, ‘좋은 아빠’되는 일이 이토록 쉬울 줄이야. 하지만 나는 그 칭찬이 너무 부담스러워 식은땀을 뻘뻘 흘린다. 말했다시피 마누라에 비해 시간이 남아돌았을 뿐이다. 일터가 따로 없으니 월차를 쓰거나 일찍 퇴근할 필요도 없고, 이따금 환기 차원으로 도서관을 찾을 때 말고는 애가 집에 있는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는 편이다.
그렇다고 애와 열심히 놀아주는 것도 아니다. 장기나 알까기로 시간을 때우거나 큰 수고가 들지 않는 아재개그와 초딩개그 대결로 시간을 때운다. 특히 아재개그와 초딩개그 대결을 선호하는데, 나는 가만히 누운 채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 외 나머지 시간은 나는 내 볼일을 보고 애는 자기 볼일을 보면서 각자 알아서 때운다. 함께 있는 시간을 공유할 뿐 그 시간에 무언가 특별한 이벤트를 궁리한 적이 없다. 내 역할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데 어디 가면 매번 ‘좋은 아빠’라는 칭찬도 듣고, 심지어 ‘좋은 남편’이라는 칭찬까지 덤으로 챙긴다. 그럼 마누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안경을 고쳐 쓰며 말한다.
“좋겠네. 엄마들은 자기 자식 살뜰히 보살피는 일이 너무 당연하고, 어디 가서 ‘맘충’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인데.”
마누라의 이 한마디를 떠올리면, 어디 가서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칭찬을 들을 때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다. 나도 그 정도 양심은 있다는 얘기다.
애 학교 학부모 상담도 그렇고, 마누라와 나는 사실 종종 당황스럽다. 집에서는 성역할 구분이 없지만 집 밖만 나가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 취급을 받고, 마누라는 어쩔 수 없이 여자 취급을 받는다. 남들 앞에서 나는 남편이나 아빠 노릇을 해야 하고, 마누라는 아내나 엄마 노릇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마누라가 남편이나 아빠 노릇을 하거나 내가 아내나 엄마 노릇을 한다면 본성과 순리를 거스르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 더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누라의 신체 조건은 틀림없이 여성이지만, 마누라의 내면은 남성과 가까울 수도 있다.
가령 한번은 동네 마트에서 마누라와 장을 보고 있었다. 채소 코너에는 봄나물이 잔뜩 진열돼 있었고, 나는 마누라에게 모처럼 봄나물로 된장찌개를 끓여 먹자고 했다. 깨끗하게 손질된 달래를 장바구니에 담으려는 찰나였다. 마누라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봄에는 냉이 된장찌개를 먹어 줘야지.”
냉이는 깨끗하게 손질된 달래와 달리 흙투성이였고, 줄기와 뿌리가 사정없이 엉켜 있었다. 채소 코너 사장님이 자기 동네 야산에서 냉이를 손에 잡히는 대로 쓸어 담은 것만 같았다. 한눈에 봐도 냉이는 손질이 까다로워 보였다. 아무래도 달래가 간편할 것 같아 나는 끝까지 달래를 고집했지만, 마누라는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말했다.
“봄에는 냉이 된장찌갠데...”
결국 흙투성이 냉이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예상했던 대로 냉이 손질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냉이 뿌리의 흙을 털어내고, 냉이를 흐르는 물에 씻은 다음 잔뿌리를 제거하고, 잔뿌리를 제거한 냉이는 흙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식초물에 담가야 했다. 대관절 괜히 억울했다. 대체 어떤 조상님이 빌어먹을 냉이를 발견해서 나를 이 고생까지 하게 만든 걸까. 그 조상님은 틀림없이 남자일 테고, 제 손으로 냉이를 손질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냉이 된장찌개는 부인이 끓여줬겠지.
그 조상님 입맛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마누라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마누라도 그 조상님처럼 냉이 손질을 해본 적이 없었고, 나는 그 조상님의 부인처럼 1시간 가까이 냉이 손질을 하던 참이었으니까.(냉이를 많이 샀다) 마누라는 투덜거리며 냉이 손질을 하던 내가 안돼 보였는지 이것저것 거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거들게 없자 애 숙제를 돌보고, 밥이 익을 무렵에는 눈치껏 수저와 반찬 따위를 부지런히 식탁에 차렸다.
다행히 냉이 된장찌개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다만 마누라가 손질이 덜 된 냉이를 씹다 흙을 같이 씹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마누라는 웬일로 안경을 고쳐 쓰지 않고 말했다.
“와, 진짜 맛있는데!”
“방금 흙 씹었지? 미안해, 깨끗이 씻는다고 씻었는데...”
“아니야, 괜찮아. 그깟 흙 좀 먹으면 어때. 맛있으면 됐지.”
그렇다. 마누라는 그래도 다른 집 남편들에 비하면 제법 괜찮은 남편이다.
<아빠, 만화 안 그리고 뭐해?>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동안 보잘것없는 제 이야기를 아껴주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모두 행복하십시오. 이왕이면 '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행복합시다.
영화 <분노>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자기 생각을 일단 글로 쓰는 놈이야.” 영화 속 형사들이 발견한 살인범의 결정적 단서였는데, 제 얘긴 줄 알았지 뭡니까. 생각을 멈추지 못해 거의 중독 수준으로 글쓰기에 열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술을 먹습니다. 틈틈이 애랑 놀고 집안일도 합니다. 마누라와 사소한 일로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가끔 만화도 만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