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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어이없게도 카밀라의 병을 고친 건 아욱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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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씨, 지금 말하면서 눈이 막 반짝반짝하는 거 알아요? 나는 지혜 씨가 이렇게 애정 가득 담아서 책 소개해줄 때 정말 좋더라. 지혜 씨가 소개해주는 책들은 꼭 읽어보고 싶어요. (2018. 0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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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서, 평가받는 게 무서워서, 기대를 채우지 못할까 걱정돼서, 우리는 저마다 아욱콩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는 아욱콩을 좋아한다고, 아욱콩을 먹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을 때면, 『줄무늬가 생겼어요』의 책장을 펼쳐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다가 엉망진창이 된 카밀라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한 서점 주인이 SNS에 어떤 책에 대한 악평을 남겼다. 내가 사적인서점 SNS에서 꼭 한 번 읽어보시라고 추천한 책이었다. 같은 책이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걸까?’, ‘나에게 책 고르는 안목이 없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일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이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잠잠해졌나 싶었던 ‘깊이에의 강요’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입고할 책을 고를 때도, 책 소개 글을 올릴 때에도 업계의 평가를 따지고 손님의 눈치를 보았다. 또렷한 주관 없이 책을 고르다 보니 눈에 띄게 서점 색깔이 희미해졌다. 진열된 책 중 내가 읽은 책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갑자기 바뀐 서점 분위기 탓인지 매출마저 떨어졌다.

 

하루는 서점 일을 도와주러 온 남편이 서가를 둘러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요즘 너네 서점에 오면 읽고 싶은 책이 하나도 없어. 예전엔 책 안 읽는 나도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는데… 재미없어.” 책도 안 읽는 오빠가 뭘 아냐고 타박하며 넘겼지만 실은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책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은 서점이 되고 싶다고 말해왔으면서, 사적인서점을 좋아하던 사람들마저 거리감을 느끼도록 벽을 쌓아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책만 전하고 싶어하던 나는 사라지고, 타인의 눈치만 살피는 나만 남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일이 있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서점에서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출간 기념 행사가 열렸다. 최혜진 작가님이 사람들의 사연을 받아 그림책을 처방한 이야기를 엮은 책으로, 행사에서도 참가자들의 고민을 듣고 그림책을 처방해주었다. 그날, 참가자 중 한 분이 자기 안의 검열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게 네 나이에 맞는 일이냐’, ‘그게 지금 너한테 중요한 거냐’ 스스로를 다그치느라 너무 힘들다고 했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책이 처방될지 궁금했다. 작가님의 처방전은 데이빗 섀논의 그림책 『줄무늬가 생겼어요』 였다.

 

『줄무늬가 생겼어요』 에는 언제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소녀 카밀라가 등장한다. 카밀라는 아욱콩을 좋아하지만 절대 먹지는 않는다. 친구들 모두가 아욱콩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걸 먹는다고 놀림당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어느 날, 카밀라는 이상한 병에 걸린다. 물방울무늬로, 알약으로, 곰팡이로… 남이 말하는 대로 몸이 변하는 병에 걸린 것이다. 이런저런 치료를 할수록 카밀라의 모습은 점점 더 이상해졌다. 뿌리와 앵두와 수정과 깃털과 복실복실한 꼬리가 달린 카밀라의 괴상한 모습은 마치 타인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내 모습 같았다.

 

어이없게도 카밀라의 병을 고친 건 아욱콩이었다. 지금까지 겪은 일에 비하면 콩을 먹는다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카밀라는 용기를 내어 아욱콩을 먹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온다. “저는 사실… 아욱콩이 정말 좋아요” 용기 내어 고백하는 카밀라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 『줄무늬가 생겼어요』 를 읽으며 나는 그 용기를 배웠다.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대리사회』 라는 책을 읽고 김민섭 작가의 글과 사유에 푹 빠졌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와 『아무튼, 망원동』 까지 저자의 다른 책도 몽땅 찾아 읽었다. 또 한 명의 믿고 읽는 저자를 발견한 기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지냈던 지난 몇 달 동안은 누리지 못한 기쁨이었다. 이 책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대리사회』 전도를 했다. “이 책이 말이에요…” 신이 나서 주절주절 책 얘기를 늘어놓는 나를 보며 지인이 말했다.

 

“지혜 씨, 지금 말하면서 눈이 막 반짝반짝하는 거 알아요? 나는 지혜 씨가 이렇게 애정 가득 담아서 책 소개해줄 때 정말 좋더라. 지혜 씨가 소개해주는 책들은 꼭 읽어보고 싶어요.”

 

이게 나였다. 무언가에 푹 빠지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열정이 내가 가진 큰 장점인데, 지난 몇 달 동안 그걸 잊고 있었다. 내가 서점을 열기로 결심했던 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였는데…. 타인의 평가가 신경쓰일 때마다, 타인의 시선에 머뭇거리게 될 때마다 나의 아욱콩을 떠올린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 언제나 그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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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정지혜(사적인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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