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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미역 줄거리

‘도리’를 수행하는 돌봄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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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할머니 기일이라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할머니는 사과와 명태를 좋아했다고 한다. 가자미 식해를 맛있게 만들던 할머니는 정작 흰살 생선을 쪄서 먹기를 좋아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 타령 할 때가 많다. (2018.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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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엘가 힉스, <여성의 임무-노인 돌보기>, 1862년

 

 

(외)할머니 집안에는 딸만 다섯이고 아들이 없었다. 그 집은 옛날 옛날에 동네에서 ‘이서방네’로 불렸다. 그 동네는 경주 이씨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집성촌이다. 동네 사람들이 다들 엄마와 먼 친척이다. 이서방네는 딸만 다섯이라 당시의 풍속에 따라 아들을 입양했다. 아들을 입양하는 나름의 ‘법도’가 있다. 큰집에 아들이 없으면 작은집의 큰 아들이 양자로 가고, 작은집에 아들이 없으면 큰집의 작은 아들이 양자로 가는 게 당시 법도였다고 한다. 이서방네는 큰집이라 작은집의 큰 아들을 양자로 데려왔다. 그러니까 이서방의 조카가 이서방의 아들이 되었고, 내 할머니의 사촌 오빠가 법적으로 친오빠가 되었다. 어릴 때는 당연히 이러한 관계를 몰랐고 나중에 엄마에게 전해 들었다. “그때는 다 그랬다”는 말과 함께. 아들 낳겠다고 ‘씨받이’를 들이거나 둘째 부인을 만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으로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처럼 여겨시던 시절.


이서방네 딸 다섯 중 학교를 다닌 사람은 막내인 내 할머니 뿐이다. 아들과 막내딸만 학교에 보내고 다른 네 딸은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집안에 토지가 꽤 있었는데 당연히 모두 아들에게 상속했다. 아들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재산상속에 있다. 출가외인이 되어 다른 성을 쓰는 자식을 낳아 기를 딸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가 외삼촌이라 부르고 할머니가 오라버니라 부르던 그 아들은 동네에서 <전원일기>의 김회장같은 존재로 점잖게 품위 유지 하며 살다 가셨다. 그 집 부엌에 술과 각종 한과는 떨어지는 날이 없었고 항상 먹거리가 풍성했으며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집어 먹었다. 말 그대로 ‘곳간에서 인심나는’ 경우였다.


이서방네 딸들은 각자 결혼을 했으나 남편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어떤 남자와 결혼했는지에 따라 혼자 남은 여자의 생계 전선은 달라졌다. 그렇게 당시는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가 되었다. 운명이 남자에게 달린 삶이라니. 물려받은 재산은 없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는데 남편들은 일찍 죽은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농사 짓는 집에 시집 간 여자들은 농사를 지었지만 나의 할머니는 땅이 없어서 대신 채소와 식료품을 팔았다.


생선가게만큼은 아니지만 할머니의 가게에서 팔던 식료품들도 대부분 그날 그날 신선하게 관리해야 하는 품목이 많았다. 예를 들면 두부나 물미역이 그랬다. 물미역 중에서 굵은 줄기 부분을 찢어서 미역줄거리로 만들어 팔았다. 할머니의 저녁 시간은 대부분 미역을 미역줄거리로 만드는 노동으로 채워졌다. 미역이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소금물을 씻어내고 모습을 정돈한 뒤 홀로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시장에 가지런히 놓여있을 리는 없으니까. 5센티 정도 길이의 나무토막에는 바늘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넓적한 미역 줄기를 들고 바늘을 든 한 손으로 줄기를 죽 찢으면 꼿꼿하던 미역 줄기는 순식간에 먼지털이처럼 갈갈이 찢겨서 축 늘어진다. 그러면 손으로 그 줄기를 죽죽 찢어낸다. 한 움큼의 미역줄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수없이 미역 줄기를 바늘로 찢는다. 어릴 때 할머니와 살면서 저녁이면 늘 할머니, 엄마와 함께 이 미역 찢는 일에 동참했다. 그저 재미있어서. 분명 할머니에게도 살결이 부드러운 때가 있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손끝은 굳은살이 박히고 손톱 끝은 늘 바짝 깎여져 있었으며 손등은 마른 누룽지처럼 퍽퍽했다.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1년 반 정도를 요양원에서 보냈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누워서 간병인이 주는 요구르트를 겨우 받아 먹을 뿐이었다. 요양원에 가기 전 늙은 어머니 모시는 일은 딸이나 며느리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 여성들 간의 교대로 이어지는 노동은 썩 원만하지만은 않다. 여자들끼리 지지고 볶으며 미안해하고 원망하고 죄책감을 가진다. 물론, 아들들은 ‘돈 벌러 밖에 나가야 하니까’로 모든 가정사의 책임에서 물러설 수 있다. 아들들은 체면을 지켰다. 그 와중에 이 여자들은 ‘남편 밥’까지 챙기느라 분주했다. 그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다. 효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세상에 문제를 만들지 않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그 좋은 사람들의 체제 순응적인 성실함과 도리는 다른 성(性)을 가지고 다른 성(姓)을 쓰는 이들의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 그 여성들 또한 ‘좋은’ 사람들이라 ‘내가 좀 손해 보고 말지’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도리를 수행한다.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 은 거시경제학에서 탈락시킨 여성의 돌봄노동에 집중한 책이다. 거의 20년 전 책이고, 미국의 예가 많지만 노인 돌봄과 아이 양육이 여성에게 맡겨진 사회의 현실은 다르지 않다. 저임금, 높은 이직률, 공적 영역보다는 가정의 문제로 축소되는 양상은 같다. 돌봄은 주로 도덕적 문제에 머물러 있다. 특히 유교문화권은 ‘효’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착한 자녀의 딜레마가 있다. 자발적으로 먼저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 일에 묶여 버릴지 모른다.” (72쪽) 이를 도덕의 관점이 아니라 경제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돌봄노동이 여성을 경제적으로 취약하게 만드는지 보인다. 경제학자들의 농담처럼, “전업 주부와 결혼하면 GDP를 낮추는 것이고, 어머니를 양로원에 모시는 일은 GDP를 올리는 일이다.”(109쪽) 전업주부의 노동은 경제활동에 들어가지 않지만 양로원에서의 돌봄 노동은 일자리 창출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나의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돌보고, 엄마의 아들의 딸을 돌보고, 남편의 누나인 독신 시누이를 챙겨왔다. 그 독신 시누이, 나의 고모는 또 제 엄마인 나의 할머니를 돌봤다. 독신 여성들이 집안 사람을 돌보는 노동은 더욱 잘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아프면 아내가 돌보지만 대부분 아내가 아프면 집안도 제대로 안 굴러가고 이 아내를 돌보는 사람도 별로 없다. “나이 든 친척을 무료로 일주일에 여덟 시간 이상씩 돌보는 사람들의 3분의 2가 승진이나 훈련 기회를 놓쳐 직장에서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놀랍지 않게 50세 이상의 노인을 집에서 돌보는 사람들의 약 4분의 3이 아내, 딸, 자매, 친구 등 여자들이다.” (73쪽)


어린 아이의 양육은 ‘자라나는 미래’라는 생각에 그나마 사회적 관심을 받는 편이다. 출산에 대한 독려는 아이를 미래의 ‘공공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늙어 사회적 생산 활동의 영역에서 멀어진 이들의 돌봄은 더욱 소외되어 있다. 소멸될 대상을 돌보는 일이기에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다. 성장하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자식의 미래를 통한 보상을 기대한다면, 죽음을 향해가는 노인을 돌본다고 이러한 보상을 기대하진 않는다. 일부의 자산가만이 상속이라는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는 대가로 자녀에게 질 좋은 돌봄을 기대할 뿐이다.


저임금이나 무임금을 변호하기 위해 흔히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일에서 만족감을 얻는다고 해서 그 일의 생산적인 의미가 감소되지는 않는다. 영화배우, 야구선수, 최고 경영자들처럼 요즘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도 보통 자기 일을 사랑한다. 일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월급을 시장 노동의 가치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다룬다.”(107쪽) 그렇다. 노동자가 그 일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그가 받을 임금과 별개의 문제다. 사장님은 회사를 사랑하니까 돈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사랑? 나는 할머니가 뭘 좋아했는지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적 있다. 그 사람이 뭘 좋아했는지 모른다는 건 오직 사랑을 받기만 했다는 뜻이다. 얼마 전 할머니 기일이라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할머니는 사과와 명태를 좋아했다고 한다. 가자미 식해를 맛있게 만들던 할머니는 정작 흰살 생선을 쪄서 먹기를 좋아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 타령 할 때가 많다.


내가 본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미역줄거리 보다는 건조된 고구마줄기에 가까웠다. 툭 건들면 바삭바삭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윤기 없고 바짝 말라 있었다. 할머니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는 외쳤다. “엄마는 단백질 부족으로 죽은 거야!”라고. 온 몸의 단백질을 모두 자식의 삶에 쏟아 부었다. 이제 이서방네 딸 다섯은 모두 죽었다.

 


 


 

 

보이지 않는 가슴낸시 폴브레 저 / 윤자영 역 | 또하나의문화
최소한의 이타주의가 없이는 사회를 재생산할 수 없기에 서로를 돌보는 책임 내용과 강제 방식에 대한 합의와 결정이 필요하며 그에 걸맞는 경제 이론이 요청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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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보이지 않는 가슴

<낸시 폴브레> 저/<윤자영> 역18,000원(10% + 5%)

여성주의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매사추세츠대학 경제학 교수, 대중경제학센터 상임경제학자)가 쓴 경제 에세이. 이 책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맹신하는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사랑·의무·호혜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과 공동체의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기대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남녀는 법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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