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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들의 ‘번외 편’
브루흐 : 바이올린 협주곡, 스코틀랜드 환상곡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잠깐 꿈을 꾸고 온 듯 순식간에 지나갔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2018. 02. 19)
언스플래쉬
'클래식', '자유', '즉흥'.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단어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만남의 장이 있으니, 바로 '환상곡'이다. 대체로 즉흥적인 성격의 곡으로, 형식적인 제약에서 벗어난 낭만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의 곡이 많다. '정석' 클래식만 작곡했을 것 같은 바흐에서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쇼팽, 브람스, 브루흐, 사라사테, 리스트까지 의외로 정말 많은 작곡가가 환상곡을 남겼다. 그들이 남긴 환상곡은 때로는 피아노 소품집이기도 했고, 때로는 오페라를 변형한 곡이기도 했고, 또 때로는 교향곡이나 협주곡이기도 했다.
'판타지'라는 단어는 무의식의 표현이라고도 정의된다. 무의식의 영역과 꿈꾸는 듯한 세계를 상징하는 공상의 영역이랄까. 즉 '실재하지 않는 허구이지만 몹시 그럴듯한, 한계가 없는 자유로운 어떤 것'이 바로 판타지, 환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가들에게 '환상곡'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특정한 틀에는 끼워 맞출 수 없었던 그들의 무한한 음악적 낭만과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낸 '번외 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환상곡을 좋아한다. 간혹 여러 작곡가의 환상곡을 모아놓고 들을 때가 있는데, 그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곤 한다. 이번에 소개할 곡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연주한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이다.
브루흐는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난 지극한 낭만주의 작곡가다. 단지 시대적 분류에서 그를 낭만주의 작곡가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독일 낭만주의의 전통 위에 서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에 들어서 브루흐는 베토벤이나 바흐처럼 유명하지 않기에 왠지 대성한 음악가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브루흐의 살아 생전 명성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명성의 상당 부분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으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합창 음악 작곡가, 교수로서도 상당히 존경받은 브루흐였지만, 살아 생전 그리고 사후에 이르러서까지 브루흐의 이름을 빛내주었던 곡이 바로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다. 그 곡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브루흐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짧은 대목에서 강렬히 짐작할 수 있다.
“저기 저들은 이곳 구석구석에서 내게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외치고 있어. 마치 내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이 1번 하나만 있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아. 난 그 따위 인간들의 지긋지긋한 타령에 미칠 지경이야. 내 생각엔 2번이나 3번 협주곡도 1번만큼이나 훌륭한데 말이지. 제발 이제들 그만해줬으면 좋겠어!”
어쩌면 그에게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스스로 뛰어넘고 싶던 산이자 족쇄였던 걸까. 그래서 오늘은 브루흐의 소원대로(?) 협주곡 1번이 아닌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소개하려고 한다. 내게 '환상곡'과 '바이올린'의 매력을 처음 알려준 곡이었던 「스코틀랜드 환상곡」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다. 얼핏 듣기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같지만 정확히 협주곡의 형식을 띠고 있지는 않고, 앞서 설명했듯 형식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작곡된 '환상곡'이다. 40대 초반, 스코틀랜드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던 브루흐는 스코틀랜드 민요와 무곡의 멜로디를 기초로 이 환상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민요를 정말 사랑했다고 알려지는 브루흐. 민요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이썽 그 어떤 곡보다 독창성이 뛰어난데, 브루흐는 이러한 독창성과 아름다움을 찬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환상이 더해져서일까.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은 그 출발이 민요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다채로움과 풍부함을 뽐낸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잠깐 꿈을 꾸고 온 듯 순식간에 지나갔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4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각 악장마다 너무나 아름다운 주제 선율들이 바이올린과 하프의 연주로 제시된다. 바이올린의 선명한 소리가 하프의 몽환적인 소리와 어우러지는 순간에 무의식의 세계가 열렸고, 이에 더해지는 관현악은 나를 더욱더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버렸다. 음악을 듣는 내내 나를 들었다 놓았다, 휘어잡는 선율과 리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스코틀랜드 환상곡」은 곡 자체만으로도 큰 감동을 주었지만, 편협했던 음악적 선입관을 깨뜨리며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바이올린의 높고 날카로운 듯한 음색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바이올린이 이렇게 그윽하면서 절절하고, 유쾌하면서 힘 있고, 찬란하면서도 유연한 악기였던가. '몽환'과는 거리와 멀어 보이는, 그저 깐깐할 것만 같은 이 악기가 하프와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니!"
바이올린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환상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곡을 쓰며 종종 다양한 악기 소리를 조합해보곤 한다. 실제로 전혀 쓸모없을 것 같던 음역대에서 멋진 소리가 나오기도 하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악기 혹은 화성이 만나 의외의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슬쩍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예전에 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내게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연주하는 건 본인에게도 '판타지'라며 이 곡이 얼마나 연주하기 어려운 곡인지 열변을 토하며 설명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실황은 물론이고 음반도 별로 많지 않은 편인데, 보물찾기 하듯 찾아낸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의 명반 중 하나가 정경화의 음반이다. 세기가 바뀌기도 전인 그 옛날, 1970년대에 벌써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정경화. 이제는 많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우러러보는 거장으로서 자리매김한 정경화의 연주는 굉장히 서정적인 동시에 직설적이어서, 선율 하나하나가 더욱 생생하게 마음에 꽂힌다. 이 음반에는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비롯해 브루흐의 인생 작품이라고 불리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도 함께 실려 있는데, 브루흐의 편지를 읽은 당신이라면 「스코틀랜드 환상곡」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머릿속을 비우고 싶은 날이 있다면 꼭 한번 스코틀랜드 판타지와 함께 세상의 번뇌로부터 벗어난 환상의 세계로 빠져보길 바란다.
브루흐 : 바이올린 협주곡, 스코틀랜드 환상곡 - 정경화정경화 연주/Rudolf Kempe 지휘/Royal Philharmonic Orchestra 오케스트라 | Universal / DECCA
파격적인 레퍼토리와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또한 높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문화에 있어서 그 이름만으로도 명품 클래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관련태그: 브루흐, 클래식, 스코틀랜드 환상곡, 바이올린
피아니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美버클리음악대학 영화음악작곡학 학사. 상명대학교 대학원 뉴미디어음악학 박사. 現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음악학과 전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