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교석의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블록이 아닌 스토리를 쌓아가는 장난감
플레이모빌의 매력
척박한 역사 속에서 남자의 공간이란 새로운 문화가 만나 꽃 피운 산업이 바로 키덜트다. (2018. 02. 06)
Old Green Figures Playmobil Funny Police Officers
혼자 사는 남자들은 아무래도 무언가 많이 사게 된다. 별 이유는 없다. 엄마나 아내의 매서운 눈초리라는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크겠지만 남자들이 공간을 향유하는 기본 방식이 자신을 드러내는 물건들로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맨 케이브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남자란 주관을 갖고 자신의 일상과 소비를 관리하고 향유하는 어른을 뜻한다. 금요일에 잡힌 회식에도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가거나, 방구석에다가 옷가지를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널브려놓고 사는 사람들은 논외로 한다.
이제 문제는 무얼 채워 넣느냐는 거다. 자신을 대변하는 물건은 곧 취향과 문화와 결부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대부분은 퍽퍽하게 살았거나 핵우산처럼 강력한 치맛바람 아래서 ‘포시랍게’ 자란 탓에 사실상 손에 들 수 있는 선택지가 몇 가지 없다. 이런 척박한 역사 속에서 남자의 공간이란 새로운 문화가 만나 꽃 피운 산업이 바로 키덜트다. 여섯 살 언저리에서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종류의 장난감을 사 모으는 입장에서 작금의 현상을 이렇게 파악한다.
다 큰 어른 집에 장난감 좀 있다고 모두 같은 범주로 묶이는 게 끔찍하지만 어쨌든 조르고 졸라서 플레이모빌 성 한 채를 얻어낸 뒤, 지금까지 꾸준히 사 모으고 있다. 성을 축조한 다음날 아침의 설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 이후 이 성은 절대 함락되어서는 안 될 내 영혼의 성지가 되었고, 지금도 정예 기사들과 함께 내 방의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플레이모빌은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까지 레고와 쌍벽을 이루는 아이들의 루이뷔통이었다. 유서 깊은 독일의 완구 기업 게오브라(Geobra)사가 1974년에 미니피규어라는 개념을 내세워 출시한 플레이모빌은 블록 장난감을 표방한 레고와 달리 자신만의 스토리와 감성을 투영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에 특화된 장난감이었다. 블록완구로 성장한 레고가 70년대 후반 갑자기 ‘레고 머리’로 유명한 웃는 상의 미니피규어를 내놓게 된 것도 클릭키(klicky, 웃는 상의 플레이모빌 피규어 얼굴 디자인) 페이스의 플레이모빌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플레이모빌의 매력은 이들이 가장 그럴듯하다는 데 있다. 7.5센티미터의 키는 전투력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하는 레고처럼 너무 작지 않고, 영화나 애니메이션 피규어처럼 너무 크거나 사실적이지 않아 나만의 이야기를 입히는 데 적당하다. 역사적 미술 고증에 역점을 둔 디자인덕분에 감성적인 인테리어 오브제로도 각광받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빈티지 제품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물론, 나는 남자다보니 중세시대 기사와 서부시대 기병대와 카우보이만 사 모은다. 전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전시 상황이라 여기고 병력을 보충하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아이나 여성 피규어는 마련해본 적이 없다. 어른답게 관리도 철저히 한다. 일주일에 한번 총채로 털어내서 먼지가 눌러 붙지 않게 청소하고, 절대로 넘어진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장난감을 박스에 담아 보관하는 것은 우린 패전으로 간주한다. 다만, 간혹 부모님이 방문할 때만 혼기를 놓친 자식의 마지막 도리로서 잠시 베란다 창고 요새로 옮겨놓는다.
푸른숲 출판사의 벤치워머. 어쩌다가 『아무튼, 계속』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