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승한의 얼굴을 보라
김남주의 레드립 : 안녕을 가장한 갑옷
상어 떼 속을 헤쳐 나가는 세상의 모든 혜란의 입술
혜란은 자신의 입술 색을 꼭 닮은 빨간 색 블라우스를 고르며 코디네이터에게 말한다. “오늘은 좀 밝게 가자. (2018. 02. 05)
JTBC <미스티>의 한 장면
참혹하다. JTBC 드라마 <미스티> 속 고혜란(김남주)은 5년 연속 올해의 언론인상 대상을 수상할 만큼 능력 있는 앵커지만, 그의 주변은 온통 빈틈을 노리는 상어 떼로 득실거린다. 혜란의 영향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걸 못마땅한 상사는 자꾸 그의 자리에 더 젊은 앵커를 앉히려 들고, 남자 동료들은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제 뒷이야기를 퍼뜨리며 험담을 늘어놓고, 야심 있는 후배는 자꾸 박수 칠 때 자리를 물려주고 내려오라는 식으로 압력을 넣는다. 노인성 치매 증상이 있는 엄마는 아직도 혜란이 20대라고 착각하며 딸을 채근한다. “네가 언제까지 스물 다섯일 거 같아? 어어어 하다 보면 금방 서른이고 마흔이야. 한창 때 안 가꾸면 여자 늙는 건 금방이라고 했어, 안 했어?” 시부모에게는 아이도 낳지 못 하는 며느리, 동료들에겐 물러날 때를 모르는 독한 년으로 찍힌 혜란의 삶은 한국 드라마가 여자 주인공에게 줄 수 있는 시련을 종류 별로 주렁주렁 달고 있다.
김남주는 이런 혜란을 보며 가난과 고생을 헤치고 올라온 자신의 삶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도회적이고 우아한 이미지로 화장품과 아파트 광고 모델을 휩쓸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온 김남주의 삶은 얼핏 화려해 보이지만, 그 뒤에는 부친의 사업 실패 이후 송탄시청에서 각종 증명원을 떼며 모은 돈으로 대입학원을 등록해 자력으로 대학에 들어가야 했던 발버둥이 있었다. 남의 말을 하는 걸 좋아하는 이들은 김남주의 가정생활에 대한 뜬소문을 옮기고 다녔고, 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해주고 싶었던 그는 그저 서서 그 모든 소문을 견뎌내야 했다. 방송사의 어이없는 상 나눠 주기로 연기대상을 동료배우와 나눠 가져야 했을 때 불쾌한 심기를 보이자 세상은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기 싸움 좀 보라.”는 식으로 수근거렸다. 박지은 작가와 MBC <내조의 여왕>, MBC <역전의 여왕>,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 세 작품을 연달아 성공시켜 그 누구도 그에게 함부로 굴 수 없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김남주가 걸어야 했던 길은 필요 이상으로 잔인했다.
혜란은 자신의 입술 색을 꼭 닮은 빨간 색 블라우스를 고르며 코디네이터에게 말한다. “오늘은 좀 밝게 가자. 최대한 생동감 있게.” 막 방금 자신이 진행하는 뉴스의 프로듀서로부터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 참인 혜란은, 세상이 제게 뭐라든 자신은 끄떡없다는 걸 과시하듯 최대한 붉은 색으로 무장한다.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면 제 적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것을 알기에, 혜란은 제 레드립으로 자신은 별 일 없이 살고 있노라 선언한다. 자신과 혜란이 닮았다고 느꼈다는 김남주의 인생 또한 그런 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혜란들이 걸친 화려한 레드는, 어쩌면 부당하고 냉정한 세상을 향해 안녕을 가장하기 위해 두른 갑옷은 아닐까?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