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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영웅과 강자를 원하는가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연재
루쉰 『고사리를 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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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인 신화의 이면에는 현실의 그늘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빛과 그늘에 대한 냉정하고도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때 우리의 이성은 비로소 세상 속에서 작동할 수 있다. (2017.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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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힘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단지 경제적인 자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에 앞서는 것이 정신적인 자립이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진정한 자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우리 인간은 약해지면 기댈 곳을 찾게 된다. 가족, 친구, 어른,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싶어하고 도움을 얻고자 한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 아닌 이상,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의존할 항상적인 버팀목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영웅이 탄생한다.


백이와 숙제, 지조의 아이콘이 아닌 무기력한 노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천도(天道)를 거스른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 굶어 죽었다는 전설적인 현인들이다. 두 사람은 은나라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는데, 아버지가 죽자 서로 왕위에 오르기를 사양했다. 그때 주나라 문왕(文王)이 노인을 따뜻하게 모신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 가보니 문왕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백이ㆍ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이의 부당함을 간했으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마침내 무왕이 주왕을 죽이고 주왕조를 세우자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결국 굶어 죽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부끄럽게 사느니 굶어 죽기를 택한 지조와 절개의 인물로 수천 년 역사에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루쉰은 『고사신편(故事新編)』에 실린 「고사리를 캔 이야기」에서 두 사람을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백이와 숙제는 양로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둘은 시국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누다가 양로원에서 나오는 구운 전병이 매일매일 작아지는 것을 걱정한다. 형 백이는 동생 숙제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우리는 식객의 몸이다. 서백(西伯)이 늙은이를 봉양하라 했기에 우리가 여기서 할 일 없이도 지낼 수 있는 거지. 그러니 전병이 작아진다고 해서 불평해서는 안 될뿐더러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아무 말 해서는 안 된다.”


양로원에서 밥을 얻어먹는 신세이니 주는 대로 먹고 아무 불평 없이 지내자는 자조 섞인 얘기로 들린다. 이에 숙제가 “이제 우리는 여생이나 신경 쓰는 늙은이가 되어버렸군요”라고 하자, 백이는가장 좋은 건 말을 안 하는 거야. 난 이제 그런 얘기 들을 힘도 없어”라고 대답한다. 백이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숙제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지조의 상징이었던 두 사람이 양로원에서 전병을 받아먹으며 여생이나 신경 쓰는 힘없는 노인들로 등장하는 것이다. 루쉰은 백이와 숙제의 영웅적인 전설을 그렇게 해체하기 시작한다. 


영웅은 없다. 다만 만들어질 뿐

 

사마천의 백이ㆍ숙제와 루쉰의 백이ㆍ숙제 가운데 어느 것이 진실이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모든 시대에는 여러 개의 진실이 주장되기에 복수의 진실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영웅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영웅에 관한 진실은 상상력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그 영웅을 중심으로 미화된 진실 세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영웅의 서사는 이성과의 충돌을 동반한다. 그것은 사실을 건너뛴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믿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문학 작가가 되기 이전에 오랫동안 정치평론을 해왔다. 그런데 정치 세계에는 저마다의 영웅들이 존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영웅을 중심으로 정치의 서사를 쓴다. 나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정치적 영웅을 인정하기를 거부해왔다. 다른 사람들이 영웅이라 칭송하는 인물들이 훌륭한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정치라는 것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일진대, 그곳에 지고지선의 얼굴만 가진 우리들의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니 어떤 영웅도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영웅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일은 무척 위험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이 모두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며, 영웅에 대한 합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웅적인 신화의 이면에는 현실의 그늘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빛과 그늘에 대한 냉정하고도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때 우리의 이성은 비로소 세상 속에서 작동할 수 있다. 가짜 영웅 만들기가 이성의 작동을 막아버린 최악의 사태를 우리는 얼마 전 박근혜 정부의 탄생과 몰락을 통해 목격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저마다 자신의 영웅을 만들어놓고 그 울타리에 갇혀버리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자신의 영웅을 무오류의 신화로 포장하고 그의 잘못까지도 뒤따르기에 급급하다. 거기서 본래 가졌던 나의 생각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내가 아니라, 그 영웅이 내 생각의 중심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의 이성은 작동을 멈추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될 영웅은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웅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다.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유창선 저 | 사우
환자들은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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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창선 (시사평론가)

진보적 시사평론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요즘은 인문학 작가이자 강연자로 살고 있다. 쓴 책으로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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