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서 바예호를 읽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편집 후기
이 책을 편집하며 누렸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기쁨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정현종, 민용태, 진은영, 김선우, 임솔아, 이현우, 정혜윤, 김한민 등 바예호를 애정하는 국내 문인들에게 받은 응원의 말들이다. (2017.10.12)
세사르 바예호를 알게 된 것은 4년 전, 한 선배의 SNS에서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는 시를 보고 나서부터다. ‘인간은 무엇무엇하는 존재’라는 규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는 정의는 나를 뒤흔들었고, 그 울림은 깊었다. 이 시에는 ‘감동’이라는 시어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마지막 연에서 세 번이나 나오는데, 감동을 주기에는 진부할 수도 있는 ‘감동’이라는 말이 그렇게 오롯이 다가온 적은 없었다. 또 “인간이 때로 생각에 잠겨/울고 싶어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쉽사리 내팽개치고”라는 구절은 그때나 지금이나 몇 번을 읽어도 울고 싶게 만드는 바가 있다. 이 시가 너무 좋아서 시집을 사려고 했지만 절판이었다. 그 시집을 갖고 있다던 선배는 ‘어, 찾아보니 없더라’며 빌려주지 않았는데, 사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가 7천 원짜리 그 시집의 중고가는 7만 원이었다.
책을 만들며 다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라는 그 시집의 제목이 주는 어감이 좋았고, 희망에 대해 들어보려는 독자의 기대를 당혹스러울 정도로, 무참히 박살내며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고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그래서 곱씹지 않을 수 없는 동명의 시가 좋았다.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웠던 지난 세월, 광장의 촛불을 통해 타인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라는 깨침, 없던 희망에 어쩐지 실체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나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개정증보판에서도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려 했다. 하지만 독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세 개의 제목안으로 독자 투표를 진행한 결과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는 2등이었다. 그때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제목은 ‘한때 인생이 아주 싫었던 날에’였는데, 이 제목으로 하라는 사장님과 바예호는 ‘한때’ 인생이 싫었던 게 아니라 ‘늘’ 싫었고(즉 바예호의 시 이미지와 맞지 않고), 바예호의 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그런 표현을 제목으로 쓸 거면 원고를 돌려달라는 역자 사이에서 나는, 고통스러웠다. 어감도 비슷하고 바예호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기도 한 지금의 제목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으로 결정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 책을 편집하며 누렸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기쁨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정현종, 민용태, 진은영, 김선우, 임솔아, 이현우, 정혜윤, 김한민 등 바예호를 애정하는 국내 문인들에게 받은 응원의 말들이다. 그들이 예전에 바예호를 언급했던 문장들을 책 홍보하는 데 쓰려고 일일이 허락을 받았는데, 모두 흔쾌히 허락하며 보여주신 기대와 설렘, 감사(!)의 말들이 내게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다른 기쁨은 소리내어 읽으며 교정을 봤던 기쁨이다. 하던 대로 중얼중얼 원고를 읽는데 다른 책 교정을 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기쁨이 차올랐다. 시를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이 기쁨이구나. 그걸 잊고 살았구나. 시는 방언, 주문, 암시, 예언, 기도, 노래, 그 모든 것이구나 싶었다. 이런 기쁨이 없었다면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의 여름 휴가 기간 내내, 베란다 구석에 있는 내 책상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우리 종종 시를 읽자. 소리내어 읽자. 드라마 주인공이 읊조릴 것 같은 “나는 신이/아픈 날 태어났습니다./아주 아픈 날.”(「같은 이야기」)도 좋고, “너의 부드러운 품안에서/도데의 콩트를 읽었지. 사랑이/있던 곳이야. 잊지 마.”(트릴세 「XV」)처럼 간지러운 말도 좋다. “넘어져서 아직 울고 있는 아이가 사랑받기를./넘어졌는데도 울지 않는 어른이 사랑받기를.”(「두 별 사이에서 부딪치다」) 하며 기도도 해보자. “나의 아픔은 너무나 깊은 것이어서 원인도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그 원인이 아닙니다만 어느 것도 원인이 아닌 것 또한 없습니다.”(「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하고 자신의 고통을 작게 소리내어 말해보자. 삶에는 그런 순간들이 필요하니까.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세사르 바예호 저/고혜선 역 | 다산책방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단테 이후 가장 위대한 우리 모두의 시인” 20세기 중남미 시단의 거장 세사르 바예호의 시선집, 20년 만의 재출간!
관련태그: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다산책방, 세사르 바예호,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다산책방에서 책을 만듭니다.
<세사르 바예호> 저/<고혜선> 역12,600원(10% + 5%)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단테 이후 가장 위대한 우리 모두의 시인” 20세기 중남미 시단의 거장 세사르 바예호의 시선집, 20년 만의 재출간!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20세기 중남미 시단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페루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