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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살아가는 인생인 양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과 다코타 스위트의 ‘When Skies are Grey’
어쩌면 종말을 경험한 뒤의 회상하는 아름다움이란 기억이 윤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절망은 어떨까? 흐린 날들이 거듭된다는 우울한 마음은? 이것은 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일까? (2017.07.17)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벨 에포크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전쟁을 떠올린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아니었어도 전쟁 전의 유럽이 그토록 평화롭고 풍요롭게 기억될 수 있었을까? 이처럼 벨 에포크란 그 시절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야 회상할 수 있는 무엇이다. 이는 끝나기 전까지는 벨 에포크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번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아가는 방법은 이미 살아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여러 모로 이 소설은 너무 늦게 그러니까 ‘1971년에야’ 출간됐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야 번역된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70세의 작가가 10대 소년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이 그렇고, 그 소년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1930년대 나치 치하의 독일이라는 점이 또 그렇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이 소설의 결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첫째 10대 소년들은 곧 자신들의 유년기가 끝나는 것을 지켜볼 것이다. 둘째 나치 치하의 독일은 점점 나빠지다가 결국 파국에 이를 것이다. 작가는 물론이거니와 독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감상 포인트는 종말과 파국 이전의 삶을 주인공들이 얼마나 누리느냐에 달려 있다. 도입부부터 작가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놓는다.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넘는, 9천 일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별다른 희망도 없이 그저 애쓰거나 일한다는 느낌으로 공허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갔다. 그중 많은 나날들이 죽은 나무에 매달린 마른 잎들처럼 종작없고 따분했다. 내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의 원천이 될 그 소년에게 처음 눈길이 멈췄던 것이……(21쪽)
이 도입부는 사실상 이 소설의 모든 내용을 밝히는 셈이다. 세계문학전집의 애독자라면 이 다음부터 펼쳐지는 광경에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그 소년, 콘라딘이 슈투트가르트의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에 전학오는 첫 장면은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소년 샤를 보바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시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두 학생이 친해진 뒤 벌어진 세상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서술할 때는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의 문장과 공명하기도 한다.
다음 몇 달 동안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봄이 와서 온 천지가 벚꽃과 사과꽃, 배꽃과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진 꽃들의 모임이 되었고 미루나무들은 그 나름의 은빛을, 버드나무들은 그 나름의 담황색을 뽐냈다. 슈바벤의 완만하고 평온하고 푸르른 언덕들은 포도밭과 과수원들로 덮이고 성채들로 왕관이 씌워졌다. 그리고 높다란 박공식 공회당이 있는 작은 중세 마을이며 그런 마을의 분수대들.(56쪽)
이것이 바로 이미 살아본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자의 눈에 비친 세상이다. 화자인 유대인 소년 슈바르츠는 마치 그로부터 십여 년 뒤에 벌어질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사람처럼 그 시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그러나 『첫사랑』의, 그 아름다웠던 세계를 순식간에 붕괴시켰던 것과 똑같은 것이 『동급생』의 세계도 망쳐버리고 만다. 그것은 독일의 백작 집안의 아들인 콘라딘이 우정 앞에서 감췄던 비밀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동급생』의 ‘비밀’은 짐작하다시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정치적 사건과 결부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 앞에서, 혹은 이 사실 때문에 아름다운 시절은 더욱 아름답게 왜곡된다.
다코타 스위트의 ‘When Skies are Grey’는 궂은 날이 계속될 때,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는 노래다. 달콤한 이야기를 원한다면 많은 가수들이 부른 ‘You are My Sunshine’을 들으면 될 테지만, 이건 쓰라린 이야기다. 내게 궂은 날들이 계속될 때, 네가 나의 햇살이 되어줄 수 없을 때, 그때 너는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전혀 없을 때, 그때 과연 너는? 노래 속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동급생』 속의 화자도 히틀러를 가리켜 ‘확신에서 오는 순수한 힘과 강철 같은 의지, 천재적인 강렬함, 예언자적인 통찰’을 가졌다고 말하는 친구에게서 한없는 절망을 느낀다. 그렇게 한 시절은 종말을 고한다.
어쩌면 종말을 경험한 뒤의 회상하는 아름다움이란 기억이 윤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절망은 어떨까? 흐린 날들이 거듭된다는 우울한 마음은? 이것은 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직 마지막 순간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이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이 소설이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으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인생을 다 살고 나면 수많은 말들이 무슨 소리였는지 확실히 알게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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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이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섰다. 대표작에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