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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기억하려면 잘 잊어야 한다

『망각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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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같이 본 것을 모두 저장하고, 내 컴퓨터의 저장장치같이 10년 전 파일을 그대로 저장하고 있으면 좋겠는데, 왜 인간은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우리의 고민에 위로 아닌 위로를 주는 책이 한 권 나왔다.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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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imagetoday

 

한 번 본 것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욕심을 떠나 간절함이다. 의대를 다닐 때 시험문제로 “00병에서 수술을 해야 할 적응증을 5가지를 쓰시오”라는 문제가 나왔다. 분명히 어젯밤에 외웠던 내용이라 운이 좋았다고 여기며 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4개만 기억이 나고 마지막 5번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6개를 쓰라고 하면 5개가 기억나고, 4개를 쓰라고 하면 3개만 기억이 났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여럿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가 오래전 영화 한 편이 화제가 됐다. 왕조현이 나온 거, 홍콩영화, 귀신, 장국영, 날라 다녀… 까지 나왔는데 끝까지 다섯 명의 입에서는 영화의 제목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어떤 날은 오기가 나서 다같이 스마트폰을 꺼내서 검색은 하지 말자고 다짐을 한다. 결국 포기하고 맥주를 한잔 하며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비로소 한 명이 “아, 맞다 <천녀유혼>”이라고 소리 높여 말한다. 엄청나게 기이한 B급 영화도 아닌 그 유명한 영화 제목이 기억이 안 난 것이었다.

 

우리는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을 존경하고 대단하다고 여긴다. 최근 방영하는 tvN <알쓸신잡> 같은 프로그램에서 다섯 명의 출연자는 사전 준비 하나 없이 ‘썰’을 푸는데 그 내공의 바탕이 되는 경험뿐 아니라 기억과 디테일이 대단하다. 나도 저렇게 잘 기억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나지만, 오늘도 자장면을 먹고 나니 빈 그릇 안에 한 번 베어 문 단무지가 세 개나 발견되었다. 단무지 먹은 것도 기억하지 못해 새로 그릇에서 꺼내 먹는 놈이 무슨 ‘알쓸신잡’.

 

블랙박스 같이 본 것을 모두 저장하고, 내 컴퓨터의 저장장치같이 10년 전 파일을 그대로 저장하고 있으면 좋겠는데, 왜 인간은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우리의 고민에 위로 아닌 위로를 주는 책이 한 권 나왔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브라질 신경생물학자 이반 안토니오 이스쿠이에르두의 『망각의 기술』이다. 저자는 1937년생으로 수십 년 동안 기억과 관련한 연구를 해온 노학자다. 그는 기억의 응고화와 인출에 에피네프린, 도파민 등의 신경전달물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처음 밝혀낸 학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가 기억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축적한 지식과 통찰을 바탕을 잘 기억해내는 능력뿐 아니라 ‘망각’이라는 것도 인간의 생존과 적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힌 책이다. 두껍지 않은 분량이나 읽기에 만만하지는 않다. 다양한 신경전달물질의 이름, 뇌의 해부학적 구조물, 생리학 용어와 그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노학자의 오랜 사유 속의 통찰이 빛나는 몇 몇 해석들만 읽어도 그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오늘 주차한 곳이 어디인지 혼동하지 않으려면 2일 전에 회사 주차장의 어디에 주차했었는지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단언한다.

 

이렇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기억을 하고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혼동을 야기할 수 밖에 없고, 사용하지 않거나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 해석하고, 이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데 방해가 된다. 뇌 용량은 제한적인데 외부 환경으로부터 하루에도 수천 수만 개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다. 만일 이것을 다 기억한다면? 또, 아주 어릴 때부터 익힌 수많은 것들이 계속 차곡차곡 쌓여서 성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남아있는다면? 혼란만 야기할 것이다. 1살 이전까지는 기어 다니는 것이 유일한 운동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기어보려면 매우 어색하다. 더 나은 걷고 뛰는 방법이 있으니 기는 능력은 자연히 소멸된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일 년 가까이 쓰던 기술이지만 필요 없으니 과감히 삭제해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쓰이지 않는 기억은 새로운 기억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정리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탈리아 철학자 노르베르트 보비오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다”라고 말했지만 저자는 “우리가 잊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든다”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뇌가 망각을 하는 방법을 습관화, 소거, 차별화, 억압이라는 네 가지 기능을 사용한다고 제시한다. 어떤 일은 습관화로 가볍게 무시하고, 어떤 기억은 지워버리고(소거), 중요한 일만 기억하고 다른 것은 잊어버리고(차별화), 정말 고통스러운 기억은 ‘억압’해서 저 멀리 떨어뜨려 놓는 망각을 한다. 이렇듯 실제로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기억으로의 접근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기억을 인출할 때 사용하는 자극에 대한 반응을 억제하여 더 이상 기억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그것을 필요할 때 인출할 때에만 비로소 그 기억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외의 시기에 그 기억은 우리가 닿지 못하는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반복해서 사용할 것은 단백질화해서 해마에 저장을 해서 장기기억으로 두고, 자주 사용할 것들은 그중에서 깊이 두지 않고 손에 닿을 가까운 곳에 둔다. 마치 바탕화면에 파일을 띄어놓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매일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를 다 해마에 단백질화해서 둘 필요는 없다. 그런 수고를 들이지 않고 매일 들어오는 정보는 잠깐 작동하는 작업기억 속에서 여러 가지 정보 중에 새롭고 중요해서 저장해야 할지 말지, 이미 알려진 정보라 무시하거나 삭제할지 뇌가 인식하게 분류를 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이 아니면 과감히 패스하고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 과정을 넘어온 정보만 남겨두고 이를 단기기억으로 둔다. 이것은 집을 짓는 동안 호텔에서 잠시 거주하는 것과 같다. 이때도 두고 보고 있다가 또 반복될 일이 아닐 것 같으면 폐기처분이 된다. 그런데, 감정적으로 자극을 받은 일이거나, 반복되면서 자주 쓸 일이 있을 것 같은 정보라는 것이 판명되면 비로소 장기기억으로 전환이 되어 오래 저장되는 정보로 남겨진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수많은 자극 들 중에 장기기억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될 자극은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외의 99%는 망각되어버린다.

 

또, 이렇게 장기기억이 된 것이라 해도, 뇌의 정보저장장치는 제한적인 용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래 사용하지 않으면 순차적으로 서서히 소멸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실은 축복일 수 있다. 괴로운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 기억이 옅어지거나,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또 저자는 망각이란 대부분 기억의 흔적 자체가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인출이 억제된 것일 뿐이라고 한다. 물론 중요하지 않거나 오래전 일이라 사용할 일이 없는 아주 어릴 때 습득한 정보는 대부분 영원히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자리를 양보해주는 것이다. 비어야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너무 많은 것을 시시콜콜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도리어 새로운 정보를 쉽게 획득하고 외우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도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러니, 실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면 적당히 망각할 줄 아는 것은 진짜 중요한 일이 생길 때 바짝 신경 써서 잘 습득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저장할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약간의 마음의 위안은 되지 않는가? 우리는 99%의 확률로 잊기 위해 기억하고 있지, 영원히 저장하기 위해 기억을 하고 있지 않다. 그게 인간적 인간이다. 
 


 

 

망각의 기술이반 이스쿠이에르두 저 / 김영선 역 | 심심
기억과 망각,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요소가 실제 인간의 뇌에서 어떻게 투쟁하는지, 우리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특정 사건을 기억하고, 또 잊는 것인지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살펴본 책 『망각의 기술(원제: The Art of Forgetting, 심심 刊)』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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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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