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소설 작가 특집] 김보영 “SF만 쓰는 작가는 적지만 SF소설은 무궁무진”
『저 이승의 선지자』 선악 없이 개개인이 공존하는 사후세계
저는 SF를 음악으로 비유할 때 락으로, 사람으로 비유할 때 여자로 비유하는데요. 사실 그 개별성과 구별성을 찾아내려고 사람들이 많이 노력하지만 실상 락의 90%는 다른 음악과 같고, 여자의 90%는 보통의 사람이죠. 문학의 모든 기능을 SF도 갖고 있고, 문학이 발현하는 기제를 SF도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2017.07.14)
‘선지자’들은 태초의 세계 즉, ‘명계’의 존재들이다. 이들은 ‘이승(하계)’에 ‘아이들’을 만들어 내려 보낸다. 최초의 ‘분리’가 있은 후 하계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를 거듭했고, 그곳에서 선지자들이 보낸 아이들은 학교에 간 학생처럼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첫 등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학기가 끝나면 낙제한 열등생처럼 민망해하며 돌아왔다.” 그래서 이들은 명계로 돌아오면 이승을 토론했다. 다시 내려가 ‘경이로운 경험’을 하고, ‘진짜 배움’을 얻었다. 그러나 ‘타락’한 ‘아만’이 이승을 진짜로 여기게 되면서 명계는 ‘분리’냐 ‘합일’이냐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라는 수식을 받는 작가 김보영이 그리는 사후세계 『저 이승의 선지자』는 이렇듯 사후세계라는 거대한 세계관을 통해 좋은 세계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단편집 『멀리 가는 이야기』, 『진화 신화』와 장편 『7인의 집행관』 등을 쓰고 여러 앤솔로지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온 김보영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SF로 쓰느냐는 질문에 “문학의 모든 기능을 SF도 갖고 있고, 문학이 발현하는 기제를 SF도 다 갖고 있다”고 말했다. “조지 오웰이나 올더스 헉슬리를 온전히 SF작가로 볼 순 없지만 『1984』와 『멋진 신세계』는 SF의 고전”이라는 작가의 반문에 자꾸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인간적이고 현세에 천착하는 신
『저 이승의 선지자』의 세계가 그리는 상징과 은유를 읽는 일이 참 즐겁더라고요. 전 우주가 ‘이승(하계)’이라는 설정이나 과학적 자세를 견지하는 선지자 ‘탄재’의 존재 등도 그렇죠. 이 세계를 만들 때 가장 많이 하셨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멀리 가는 이야기』 썼을 때도 그랬는데요. 한 이야기가 끝나면 마지막에 생각한 이야기를 그 다음에 이어서 진행했어요. 어린 마음이었는지『멀리 가는 이야기』를 쓸 때는 이것을 쓰고 다시는 아무것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이 좀 있었어요. 그 단편집의 결말이 우주의 끝, 세상의 끝으로 가는 거거든요. 여기까지 쓰면 더 할 얘기가 없겠지(웃음) 하는 생각이었는데요. 보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남더라고요. 죽음을 쓰고 나니까 또 사후 세계 이야기가 남고요.(웃음) 그렇게 사후 세계 이야기를 일 년 간 썼어요. 원래는 중편으로 썼는데 웹진 <크로스로드>가 분량 제한이 없는 곳이다보니 거의 장편 분량이 되었죠.
당시는 세계관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나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번에 출판사 제안을 받아 전체적으로 다듬었어요. 우선은 우리 현실 과학적인 세계관을 기반으로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저의 사후 세계를 한 번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작가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후 세계요.
지옥이나 천국으로 사람을 나누는 건 늘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일단 인간이 선악으로 둘로 나뉜다는 게 이상하죠. 그리고 이승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저승에 계속 쌓인다는 것도 질량보존의 법칙을 생각하면(웃음) 이상해요. 저승이 아무리 커도 벌써 포화상태란 생각이 들어요. 윤회가 비교적 낭비가 적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윤회 역시 한 번 잘못하면 억겁의 세월을 미물로 살다가 해탈해야 끝나는 건 과하다고 생각했어요. 미물과 인간의 생이 뭐 그리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비교적 가까운 세계관은 그렇다면?
한국 신화에 기반을 많이 두었지만 선지자들을 구성할 때 주로 생각한 것은 그리스 신화와 같은 다신교였어요. 다신교의 세계관에서는 모든 신들이 각자 인격을 가진 한 명의 신이면서 사물이면서 동시에 개인이잖아요. 저는 그 구조를 좋아해요. 아폴론이라는 신이 아폴론이라는 사람처럼 생긴, 한 명의 욕망을 갖고 개성을 가진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있는 저 태양 그 자체고 태양의 속성을 가진 개념이죠. 그 구조를 한국식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선지자(신)의 이름 자체가 개념이고 속성이고 바라는 방향이잖아요. 선악이라든가 누가 더 중요하다는 개념 없이 어우러지는 세계관을 만들고 싶었어요.
앞부분에는 ‘타락’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고 ‘아만’과 ‘합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나와요. 어쩌면 선악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요. 반복해서 ‘너는 나다, 우리는 하나다’라는 주문이 나오던 초반과 달리 뒤로 가면서 ‘분리’로 방향이 전환되죠. 이런 생각 변화는 어떤 맥락에서 일어난 건가요?
처음 구상했을 때는 분리에 무게를 싣는다고 생각했는데요. 쓰면서 제가 합일을 추구하는 세계에 너무 몰입해서 당시 버전은 합일에 좀 더 무게가 실렸어요. 지금은 분리에 더 가치를 두는 내용으로 많이 바뀌었고요.
저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성자는 착하지 않다, 사람을 짚단처럼 본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정말로 신들이 세계 전체를 공평하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고려한다면 그렇게 한 명, 한 명에게 섬세하게 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의 입장에서 보면 근시안적이고 세속적이라 해도, 좀 더 인간적이고 현세에 천착하는 신이 좀 더 우리를 사랑하는 신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신은 신들 세계에서 왕따를 당할 거야(웃음) 라는 생각으로 썼어요. 원래는 아만도 하나의 신처럼 그렸는데, 나중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집단처럼 그렸어요.
빈 공간은 SF에서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이번에 다시 쓰시면서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다면 뭐였어요?
SF를 쓰면서 항상 겪는 곤란인데요. 내가 만든 세계지만 저도 결국은 현실에 박혀 있는 한 명의 인간이잖아요. 온갖 상식과 편견에 휩싸여 있고요. 처음 웹에 올린 버전을 다시 보니까 여러 장면에서 모순이 보이더군요. 이를 테면 처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또 다른 나’로 바뀌었는데요. 원래는 ‘어머니’였어요. 생각하니까 이 세계관에서 특정하게 내가 어머니라고 부를 존재가 있을 수가 없어요. 또 예전에는 아이들한테 ‘벌을 준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죠. 내가 이미‘상도 없고, 벌도 없다’는 말을 했는데 말이에요.(웃음) 그런 것도 많이 뺐어요. 그런 식으로 모순을 제거하는 작업이 많았어요. 보통 SF를 쓸 때 후반 작업이라면 이런 것들인 것 같아요.
흥미로운 작업 뒷이야기네요.
「다섯 번째 감각」이라는 작품을 쓸 때도 그랬어요. 그 소설 배경은 청각이 없는 세계거든요. 퇴고할 때 보니까 의성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라는 식으로요. 그놈의 의성어는 퇴고할 때마다 나오더라고요.(웃음)「종의 기원」은 로봇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인데 퇴고하다 보니 로봇이 입맛을 다시고 있더군요! 결국 적당히 타협해서 인간을 많이 닮은 로봇이라고 설정을 다시 정리하죠. 『저 이승의 선지자』에서도 사실 탄재가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요.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에요. 조연이지만 탄재가 스토리를 붙들어주었으면 했어요.
탄재는 정말 매력 있는 캐릭터죠!
그리스 신화 같은 다신교 세계관에서 과학의 신이 생겨났다면 어린 아이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이제 막 생겨나서 신들이 그를 이해 못하지 않았을까 하고요. 하지만 다음 세대의 주인이 되는 건 그 과학의 신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사실 후반부에는 탄재가 살짝 주신의 자리를 꿰찬 것처럼 보이죠. 그런 세계가 미래가 된 거고요.
꽉 차고 잘 조각된 SF도 매력 있지만 어떤 빈 공간 안에서 독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SF도 큰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쓰는 입장에서는 어떤가요?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서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 같고요.
낯선 세계를 그리기 때문에 빈 공간은 SF에서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부분을 다 채울 수는 없어요. 사실 그 빈 공간을 많이 두는 작가도 있죠. 로저 젤라즈니처럼요. 듀나 작가님도 빈 공간을 두는 편이고요. 듀나 작가님은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세계관을 설명할 욕구를 가지겠느냐는 말씀도 하셨었는데요. 맞는 말이기는 해요. 그 세계 사람들은 자기 세계관에 젖은 채로 활동할 테니까요. 로저 젤라즈니도 설명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인데 역시 진입장벽이 좀 있어요. 물론 일단 그 작법에 익숙해지면 세계를 탐구하는 즐거움이 있지요. 저는 중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저는 한국어로 쓰고 있고, 만날 수 있는 독자가 적은 걸 생각하면 제 원래 성향보다는 많이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SF작가로서의 고민으로 연결되는군요.
사실은 제 글쓰기의 가장 큰 과제가 그거예요. 잘 안 되니까 더 그렇겠지만. 퇴고할 때 가장 노력을 많이 기울이는 지점이 어떻게 쉽게 설명하고 어떻게 쉽게 받아들이게 하고, 그 설명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에요. 첫 소설부터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어렵다고 이야기 들었던 십 년 전 작품을 지금 독자 분들은 별로 안 어려워하시는 것 같다는 점이에요. 그걸 너무 믿어도 곤란하겠지만요.
SF를 쓰는 많은 분들이 비슷한 고민을 할 것 같아요.
SF는 항상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SF 안에서는 약간 신선하거나 평범한 수준에서 약간 나아간 이야기인데 대중 입장에서는 그것이 너무 앞서 나아가 있는 거죠. 하지만 한 번 생겨난 아이디어는 다른 문학이나 영화, 만화에 녹아들기 때문에 몇 년 지나면 대중에게도 익숙한 것이 돼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최근 재간되었는데요. SF독자들은 너무 오래된 고전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반 독자들은 오히려 이제야 재미있게 읽으시는 듯해요.
결국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남는 작품들이 있고요.
고전이지만 허버트 조지 웰즈가 정석적인 기법을 썼어요.『투명인간』을 보면 처음부터 투명인간이 나타나지 않아요. 어느 날 여관에 손님이 오는데 날도 더운데 코트를 입고 얼굴을 붕대를 감싸고 있죠. 여관주인이 어느 날 그 사람의 입이 뻥 뚫려 있는 걸 보고 심한 장애가 있나 생각해요. 그러다가 머리가 없는 게 발견되고, 나중에는 몸 전체가 없어지죠. 그 다음에야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됐는지 설명해요. 이런 식으로 독자가 믿을 수 있는 수준을 한걸음씩 진전시켜서 일단 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독자들이 받아들이게 한 뒤에 과학적인 이야기를 하는데요. 물론 말은 안 되죠.(웃음) 하지만 최대한 당대 최신의 과학을 접목해 독자를 설득하는 거고요.
『1984』와 『멋진 신세계』는 SF의 고전이다
지금 SF작법에 대한 고민을 말씀해주셨는데요. 그렇다면 내용, 어떤 이야기를 SF로 쓸 것이냐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궁금해져요. 최근 쓰신 단편들을 보면 무척 현재적인 이슈를 다루고 계시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가령 「빨간두건 아가씨」에서 다룬 미소지니 이슈도 그렇고요. 어떠세요?
저는 SF를 음악으로 비유할 때 락으로, 사람으로 비유할 때 여자로 비유하는데요. 사실 그 개별성과 구별성을 찾아내려고 사람들이 많이 노력하지만 실상 락의 90%는 다른 음악과 같고, 여자의 90%는 보통의 사람이죠. 문학의 모든 기능을 SF도 갖고 있고, 문학이 발현하는 기제를 SF도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이 현실을 말하는 만큼 SF도 현실을 말하죠. SF가 예전보다 좀 더 현재적이 된 것은 과학이 좀 더 대중화되었기 때문이고요. 과학은 논리적 사고라는 개념의 총체기 때문에 굳이 추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현할 수 있는 문학 장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말씀이네요.
역사소설만 쓰는 작가는 적지만 역사소설이 무궁무진한 것처럼 SF만 쓰는 작가는 적지만 SF소설은 무궁무진하죠. 대부분의 거장들은 한 번씩 SF를 건드렸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고요. 조지 오웰이나 올더스 헉슬리를 온전히 SF작가로 볼 순 없지만 『1984』와 『멋진 신세계』는 SF의 고전이잖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제일 잘 팔리는 작가 중 한 명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인데 왜 계속 SF를 지엽적인 장르 취급을 하나요.(웃음)
『이것이 나의 도끼다』에서 진행하신 듀나 작가님과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죠. ‘SF적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점점 흐릿해진다’고요.
저도 SF를 쓴다는 생각을 하며 쓸 때도 있지만 제 소설을 쓴다는 생각이 많아요. 최근에 어떤 기획에서 제게 가장 영향을 준 작가를 쓰라고 해서 헤르만 헤세를 썼어요. 쓰다가 떠올린 건데요. 제가 어렸을 때엔 주로 모험 판타지를 썼고 엄청나게 많이 썼거든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가치관이 많이 무너지면서 글을 못 쓰게 됐어요. 세상이 당연시하는 가치관들을 신뢰할 수가 없게 되었고요. 『데미안』은 당시의 제게 유일하게 도움이 됐던 책이에요. ‘네 안에 신이 있으니까 그 신을 믿어라’라는 말에서부터요.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건 이것이 제가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이 됐기 때문이에요. 내가 세상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것에 대해 하나씩 소설을 쓰고, 내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스스로 배우는 거예요. 제 글쓰기는 계속 그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쓰다 보니 SF로 분류 되었다는 게 정확하겠네요.
제가 어렸을 때는 국내에 SF 자체가 번역된 것이 많이 없었어요. 접하기도 힘들었고요. 그러니 다른 SF를 기준으로 삼고 형식을 구축한 것이 아니었어요. 처음에 글을 쓸 때에도 출판 생각이 완전히 없었어요. 이런 글은 아무도 실어주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고요.(웃음) 그냥 나를 위해서 한 권의 책을 완성하자는 생각으로 썼더니 SF 쪽에서 좋아하더라고요. 지금까지도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당면한 현실과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쓰는 작업을 한국 문학에서는 SF가 받아주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김보영 소설만의 주제의식이랄까, 자신만의 테마는 무엇인가요?
글쎄요, 그것은 독자들이 발견해주지 않을까요. 뭔가 있겠죠. 본인은 몰라도 우리가 다른 작가를 보면 알잖아요. 그런데 본인들은 아마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자꾸 걸리는 이야기가 있다면요?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그렇겠지만 세월호가 여전히 마음에 있고요. 최근에는 확실히 작년 한국 게이머 게이트 이후 일어난 일련의 인터넷 현상이 계속 관심사예요. 원래 여론 조작이나 인터넷‘밈’이 도는 현상은 정부 주도 하에 조작되거나 가짜 뉴스가 나가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그게 대중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더군요. 그 밖의 무수한 양상들에 대해서요. 그것을 타파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대중에서 시작되는 여론전이라는 거죠.
사람을 사회에서 배제하는 언어가 너무 쉽게 돌고 있어요. 모 사이트의 해악은 그 사이트 활동만 안 하면 자신이 정당한 사람이라고 믿게 만든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을 악마화해도 된다는 생각을 퍼트린 거라고 생각해요. 그 피해를 결국 모두가 입고 있고요. 거기서부터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과거에는 정부 주도로‘노동자는 빨갱이’라는 말을 뿌렸죠. 그냥 인간인데 노동자니 시위꾼이니 귀족노조니 하는 편리한 이름을 붙여요. 이런 식으로 명칭을 붙이면 너무나 쉽게 대중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입에 담게 돼요. 그런데 그런 배제의 언어를 지금은 대중이 만들어요.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인간이 아니라고 칭하는 그 순간 내가 인간이 아니게 된다고 생각해요.
여기 “호의도 적의도 없이”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호의도 적의도 없이 가해하고, 시스템을 악화시키는 경우도 너무 많죠. 그런데 명계의 선지자들은 ‘대의’가 있으니 생명을 잃는 것쯤은 아파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요. 기시감이 들더라고요.
대의에 경도되는 건 위험할 때가 많아요. 종교라는 이름으로 비인간적인 악행이 일어났듯이 말이에요. 사실 그것은 전체의 대의지 개인의 대의가 아니잖아요. 전체의 이상향에 나를 동일시했을 때 모자라고 아무것도 아닌 나 개인을 거대하다고 착각하게 되면서 인간이 끝없이 잔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명계의 선지자들은 분명히 어떤 면에서 초월한 존재들이지만, 본질적으로 세계 전체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으니 개개인의 고통을 두고‘그게 왜 그렇게 대단한 일이지?’라고 생각하곤 하죠. 하지만 한 명의 개인으로서는 그 고통이 전부인 거죠. 그래서 전체에서 자신을 분리해 생각할 수 있는 개개인들이 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저 이승의 선지자』가 말하는 ‘분리’의 가치죠.
하지만 제가 소설에서 어느 한 방향으로 간 건 아니에요. 헤르만 헤세도 자기 생각의 위험성을 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외전에는 저쪽이 이긴 세계도 있고 이쪽이 이긴 세계도 있는데, 결국 가장 좋은 세계는 첫 번째 외전처럼 모두가 각자의 신념을 갖고 그 신념을 위해 투쟁할 자유를 갖고 그 자유의 권리를 인정하며, 우리가 자신의 스승을 선택할 수 있고 그들이 각자 자신의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세계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SF가 얼마나 멋진지 아느냐
인간의 선함 혹은 악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작품은 선의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나름대로 심리학과를 나와 버린 바람에요.(웃음) 심리학은 인간을 과학적으로 보는 학문이죠. 모호하고 불분명한 실체가 아니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데요. 저는 그 지점이 바로 인간의 선함을 믿는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심리학에서 주로 쓰는 말이‘아픈 사람’이라는 말이거든요.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아니면‘지금 힘든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죠. 충분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시 나아질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이 나아진다는 것도 어떤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본인이 행복하면 나아진 거예요. 그것도 역시 다 맞다 할 수는 없겠지만요. 저는 악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이고, 지금 힘든 사람이라고 보는 그 시선을 좋아해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다음 미래가 있는 거잖아요.
대개는 나쁜 사람이라고 배제하는 쪽이 쉽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기도 해요.
눈에 안 보인다고 사람이 없어진 게 아녜요. 그 사람들은 결국 현실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거예요. 배제보다 변화를 더 생각해야 하는 건 어떤 방법이 더 낫다 하는 것을 떠나서, 사람이 실제로 사라지거나 배제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쓰고 있는 게 있다면 들려주세요.
다음 달에 책이 나와요. 작년에 쓴 듀나 작가님, 장강명 작가님, 배명훈 작가님과의 공동 단편집이고요. 그 밖에 올해 계획하고 있는 것들은 다 예전 작품의 속편이네요. 계속 끊어지는 단편을 내기보다 한 번 낸 세계관 안에서 이야기를 더 풀어내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이 작품은요?(웃음) 작가의 말에서 ‘나반은 수록한 것 이외에도 무수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기대해 주시면 고맙고요.(웃음) 이것 자체가 『7인의 집행관』의 확장 세계인 것 같은데요. 「미래로 가는 사람들」과「진화신화」에서 이어지는 단편도 생각하고 있고, 당장 쓰려고 하는 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속편이에요.
2005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십 년이 넘는 시간인데요. 요즘에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세요?
네,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느껴요. 4차 산업혁명(웃음) 때문인가? 예전보다는 SF작가에게 일거리가 많이 들어오는 듯해요. 사실 처음에는 책 출판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등단하고도 출판사와 많이 연락을 했는데 잘 안 됐죠. 『멀리 가는 이야기』도 2005년에 다 쓴 건데 실제로 나온 건 2010년이거든요. 그래도 어쩌면 그 어려움 속에서도 SF작가들이 열심히 쓰셨고, SF기획자 분들도 열심히 활동하신 덕분에 조금씩 기반이 생긴 것 같아요.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요샌 SF를 쓰는 것에 대해 변명할 일은 많이 줄었지요. 요새 박상준 대표님과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글도 ‘SF가 얼마나 멋진지 아느냐’는 이야기기도 하고요.(웃음)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을까요?
글쎄요. 책은 많으니 보고 싶은 책 아무거나 보시라고 말씀드릴까요.(웃음) 사실 SF가 힘겨웠던 이유가 어떤 종류의 소설만 읽어야 한다는 강제가 사회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 읽으면 되거든요. 무얼 읽으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좋아하는 걸 보다보면 또 SF도 보시게 되겠죠. SF는 여기저기 다 걸쳐져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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