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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못한 첫 출근 날의 아름
홍상수 <그 후>
이 어처구니없는 첫 출근 날 귀갓길의 그녀 얼굴을 보라, 그녀는 자신을 더럽고 구차한 세계에 처박히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자력으로 스스로를 길어올려 아름다움의 세계로 이끈다. (2017.07.13)
영화 <그 후>의 한 장면
무려 ‘강’ 출판사의 간판 로고를 한참 카메라가 잡는다. 영화는 당연히 현실의 재현이 아닌데, 출판인인 나는 다른 관객보다 훨씬 많이 낄낄대며 이 영화를 즐긴다. 실제 ‘강’ 출판사의 대표도 잘 알고 있고, 사무실 전경이며 『문학동네』 잡지가 놓여 있는 컷이며 마지막에 사장이 아름에게 건네주는 민음사판 나쓰메 소세키의 책 『그 후』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나 같은 관객을 염두에 둔 설정은 아닐 터고 문학평론가로서 활동하는 실제 ‘강’ 출판사 대표에 대한 오마주나 풍자는 더더욱 아닐 터고, 언제나 그렇듯 홍상수 영화는 관객에게 스스로 질문하고 퍼즐을 맞추고 답하라고 한다.
이 아스라한 흑백 영화 <그 후>, 어떤 하루를 돌아보며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명상한다. 배우 김민희가 연기한 ‘송아름’은 어떤 하루를 보냈던가. 신춘문예에 육 년째 응모하고 있는, 성실히 글 쓰고 산책하기 좋아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아름의 하루를 나열해보자.
1. 교수님 소개로 문학평론가 사장이 경영하는 아주 작은 출판사에 첫 출근을 한다. 2. 모닝커피를 마시며 담담하게 자신의 신상에 대해,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와 언니의 죽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사장의 필력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 3. 점심도 사장과 단둘이 먹어야 할 형편인데, 식당 가는 길에 사장은 편하게 반말하겠노라는 친밀감을 표한다. 4. 소주 한 병 곁들인 중국집 점심 식탁에서 사장과 철학적인 대화를 나눈다. “왜 사세요”로 시작해서 ‘믿음과 실체’에 대한 이야기. 사장은 아름의 깊이 있는 생각들을 칭찬한다. 5. 오후에 출판사 사무실로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장 부인에게 사장의 애인으로 오해 받아 몇 차례 뺨을 맞는다. 6. 사장과 소주를 세 병 곁들인 곱창전골집 저녁 식사 자리에서 출판사를 그만두겠다고 한다. 7.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그만두는 일을 말리던 사장이 갑자기 나타난 애인 때문에 오히려 말을 바꿔 아름에게 그만두라고 종용한다. 8. 첫 출근한 출판사의 책들을 여러 권 선물처럼 챙겨서 택시를 탄다. 9. 택시 안에서 책을 읽는 아름에게 택시 운전사는 특별히 아름다운 사람이니 밤늦게 다니지 말라고 충고한다. 10. 택시 안에서 쏟아지는 눈을 보고 그 아름다움과 예쁨을 감탄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뜻대로 하소서.
하루를 통해 본 송아름은 누구에게도 폭력적이지 않고 피해를 입히지 않으며 질문과 답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종교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송아름의 하루를 축으로 출판사 사장과 그 아내와 애인이었던 전 직원 이창숙의 과거 나날들은 들쑥날쑥 교차 편집되며 입체적인 관계들을 보여준다.
송아름만큼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듯 비치는 사장 아내와 사장 애인 이창숙이 특별히 이상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런 사람들이다. 남편을 소유했다고 생각하고 남편의 애인에게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믿고, 가정을 지켜야 하니 가출하여 애인과 동거하는 남편에게 딸아이를 곱게 단장시켜 한밤중에 데려가는 여성이 드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유부남 사장과 연애하면서 거짓말을 지어내고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지만 그 역시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는 이창숙도 욕망에 휘둘리는 그저 그런 사람이다.
영화에서 연애 문제를 놓고 관계를 이야기하니까 피해-가해, 진심-배신 등의 키워드가 떠오르지만 삶의 다른 문제를 대입한다면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 이야기다. 게다가 사장은 어떤가. 영화에 출연하는 세 여성--아내, 애인, 첫 출근한 직원 모두에게 지질했다.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울기도 하고 딸아이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자조하면서 집으로 돌아가서 문학상을 수상한 것인가 하는 비합리적인 말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 <그 후>의 한 장면
돌올하게 아름다운 건 역시 송아름이다.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뺨을 맞고 해고당한 셈이다. 문학평론가로 존경하고 좋아했던 사장의 이면도 목격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첫 출근 날 귀갓길의 그녀 얼굴을 보라, 그녀는 자신을 더럽고 구차한 세계에 처박히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자력으로 스스로를 길어올려 아름다움의 세계로 이끈다.
그러고 보니 송아름이 중국집에서 명료하게 믿는 세 가지를 말했다. 사장이 물었다.
“그럼 아름은 믿는 게 뭐야?”
“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리고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 셋째는 모든 게 다 괜찮다 괜찮다 아름답다 영원히. 그런 이 세상을 믿어요.”
진흙탕 같은 세속, 누구랄 것도 없이 자신의 욕망에 갇혀 사는 세상에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빛이다. 이 흑백영화에서 하얗게 빛이 나는 송아름의 존재는 사건의 그날 이후에도 역시나 그 존재로 산다. 자신을 모독했던 그날들의 어떤 것에도 그녀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타인과 세상을 쉽게 판단하고 관계를 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믿음이 크고 깊은 사람, 이 아름다운 사람의 그 후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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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