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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안다고 생각하세요?

<엘르>의 욕망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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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는 사건의 범인 찾기나 냉혹한 복수, 인생의 교훈엔 관심이 없는 영화다. 아무리 제작사가 ‘냉혹하고 우아한 복수’라고 홍보 키워드를 내세워도 나는 ‘아니올시다’라고 말하고 싶다. (2017.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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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르>의 한 장면

 

<엘르>의 그녀, 역시 이자벨 위페르다. 차갑고 당당하고 바스라질 듯하고 애처롭고 저항하고 순응하고 못됐고 헌신적인, 모순된 이 모든 형용 상태를 한 몸에 지닌 여성 미셸을 연기하는 배우. 난해하다고, 외설적이고 요상한 데다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단 관객도 많은 모양이다. 마치 영화를 정확히 해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관객들을 향하듯 미셸은 이런 대사를 읊조린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거야.” 으아, 어떤 잣대로든 세상을 판단해야 할 현실감각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겐 몹시 무기력한 말은 아닐까.

 

나는 이자벨 위페르의 열렬한 팬이다. 고함치지도 않고 소란스러운 몸동작 없이도 강렬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이 배우 덕분에 캐릭터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피아니스트>, <다가오는 것들>은 내 인생의 영화가 되었는데, 이자벨 위페르가 아니라면 내 인생 운운하기는 망설였을 것이다.

 

영화를 꽤 많이 보는 칼럼니스트와 영화 마니아 친구가 단톡방에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작품에 대해 <버라이어티>지가 ‘최고의 걸작’이라 평한 것이 사실이라면 100년이 넘는 이 잡지는 영화담당 기자와 데스크를 당장 갈아치워야 한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단지 기묘한 수준을 넘어 현실성을 결여한 인물들이다.” 이 칼럼니스트의 말에 친구는 “이 세상에 정상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네. 이자벨 위페르 말고 누가 이 느낌을 표현할 수 있지?”라고 답한다. 나도 이 단톡방에 주절주절 쓰기 시작했다가 지웠다. 왜냐하면 할 말이 너무도 많았기에. 정상과 비정상, 피해와 가해, 광기와 이성의 경계를 누가 쉽게 선 그을 수 있겠나. ‘엘르’를 이해하는 일은, 한 사람의 생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마어마한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미셸이 자신의 집에서 괴한에게 강간당하는 첫 시퀀스부터 몰아치는 듯한 호흡의 영화는 끝까지 충격적이다. 피를 흘리는 몸으로 무표정하게 거품 목욕을 하고 병원에 가서 성병 검사를 마친 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업무에 몰두하는 미셸. 출판업에서 성공을 거두고 게임회사를 차린, 겉보기엔 부르주아적 삶을 영위하는 것 같은 미셸은 전남편과, 절친이며 동업자인 안나 부부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한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그들의 말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는 주위를 맴도는 강간범에 홀로 대처하겠다고 작정한다.

 

미셸은 39년 전 이웃 27명과 개 6마리를 죽이고 자신의 집을 불태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딸이었다. 그때 십대였던 미셸은 현장에서 혼란과 공포의 얼굴 그대로 사진 찍혔고 대서특필 되었다. 그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유로 모르는 사람에게 쓰레기 투척을 받는 것마저도 익숙한 삶을 살아온 것.

 

미셸은 온갖 비틀린 폭력적인 관계에 묶여 있다. 선택했다고 하기엔 이미 놓여날 수 없다. 가정폭력을 휘둘렀던 남편과는 이혼했으나 종종 그녀를 찾아오고 하나뿐인 아들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 중인 여자친구와 결혼하겠다고 징징대며 경제적으로 무력한 엄마는 어린 남자와의 결혼을 선언하며 절친의 남편은 섹스 파트너로서 끊임없이 관계를 요구한다. 심지어 자신의 업무에 호의적인 게임회사 청년은 미셸의 얼굴을 합성한 외설 동영상을 유포한다. 결정적으로 이웃 온화한 가정의 젊은 남편은 또 얼마나......말을 잇지 못하겠다.

 

미셸은 이 관계 속에서 실망하거나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그저 대처할 뿐이다. 집의 자물쇠를 바꾸고 총기를 구입하고 사격을 익히고 위협스프레이를 상비하고 동영상 유포 직원을 냉담하게 응징하며 절친 남편의 섹스 요구를 마지막을 전제로 들어준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욕망도 숨김없이 드러낸다. 억압된 분노와 좌절이 비틀린 욕망으로 분출하는 것.

 

<엘르>는 사건의 범인 찾기나 냉혹한 복수, 인생의 교훈엔 관심이 없는 영화다. 아무리 제작사가 ‘냉혹하고 우아한 복수’라고 홍보 키워드를 내세워도 나는 ‘아니올시다’라고 말하고 싶다. 감독 폴 베호벤이 <원초적 본능>의 그녀를 그리듯 욕망을 잘 다룬 영화라고 평론가가 말해도 나는 그건 또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 어떻게 말하고 싶냐고? <엘르>는 그녀 미셸이 내면의 광기에서, 욕망에서 어떻게 자유로워지는가 차갑고 조용하게 관찰하는 영화라고 말하련다.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난 그토록 경멸했던 엄마, 얼굴에 침을 뱉어주마 다짐하고 난생처음 면회를 간 날 자살한 아버지. 거의 동시에 부모를 상실하고 미셸은 너무도 늦게, 중년이 된 후 비로소 독립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어도 묶여야 했던 폭력적인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평온한 얼굴이 된다.

 

절친인 안나와 일상을 이야기하며 화면 밖으로 걸어가는 미셸의 등이 자유롭게 보였다. 그녀의 대사, 클리셰라 해도 귀중하게 들리던 그 말,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거야”를 떠올렸다.

 

그녀를, 이 영화를 해석하지 않아도 나는 알 것 같았다.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알게 만들었다. 미셸의 심연을. 살인마 광기 속에서 살아남아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미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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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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