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끝장내는 사랑이 첫사랑이라니, 용순아

영화 <용순>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유난스럽던 소녀 시대, 첫사랑의 비밀노트’란 홍보 포스터를 보았을 때, 싱그럽고 우스꽝스럽고 애틋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기대했다.

movie_image.jpg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내 그림자 속에 찍히고 있다
당신의 두 발이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반짝인다 출렁거린다
내 온몸이 쓰라리다.
-이원 시 ‘사랑 또는 두 발’ 중에서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에 수록)
 
엄마 없이 자랐고 꿈도 그다지 없는 충청도 여고생 용순은 달리기반에 들어간다. 대학교 전형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해볼 만한 일은 별로 없기에. 그저 앞을 보고 두 발로 달리기만 하면 될 듯한 (쉬운) 일인데 인생이 걸렸다.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진’ 사랑이 있었으므로. “용순아 고개 들고 달리자”고 외치는 체육 선생과 사랑에 빠졌다. 여고생 짝사랑이 아니다. 사귀는 것이다. 백일 기념 선물로 강가의 조약돌 백 개에 사랑 고백 그림을 새기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그림을 잘 그리는데, 달리기 말고도 재주가 있었네)
 
그런데 이 사랑 쉽지 않다. ‘체육’(친구들은 그냥 과목을 선생님 호칭으로 부른다)에게 ‘영어’가 붙었다. 그들은 결혼도 생각하는 관계다. ‘체육’은 삼각관계에서 주도권도 없고 어찌할 바도 모르는 그냥 ‘순둥이’라고나 할까. (아니 근데 두 여성은 왜 이 우유부단한 남자를 뺏기지 않겠다고 난리인겨.)

용순에게 비련의 여고생을 기대하지 말자. 당차고 거침없다.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떠났고 그후 세상을 뜬 엄마에 대한 상처가 깊다. 떠나지 말라고 엄마 옷자락이라도 붙잡을 걸, 이라고 ‘체육’에게 고백하기도 한다. 그 말을 듣는 ‘체육’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듯하다. 학생과 사랑에 빠진 데다 새로운 ‘영어’가 나타난 현실에 갈팡질팡이었으니. 결국 용순이 ‘영어’와 육탄전으로 벌이고 난리법석 통에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리고 있던 ‘체육’의 옷자락을 잡는다. 그러나 금세 놓는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유난스럽던 소녀 시대, 첫사랑의 비밀노트’란 홍보 포스터를 보았을 때, 싱그럽고 우스꽝스럽고 애틋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기대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사람들이 모여 만든 회사 <아토ATO>의 두 번째 작품이니 창립작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에서 느꼈던 그 감성, 깊이를 기대했다. 역시나 그 감수성은 맞닿아 있었다. 풍경을 담은 방식과 특별한 소품들, 에피소드의 탁월한 배치 등이 참 좋았다.

 

22.jpg

 

그런데 더 좋았던 것은 캐릭터. 그리고 사랑에 대한 비유였다. 용순에게 첫사랑은 스스로 끝장내기도 한 사랑이다. 위계에 눌려, 사회 통념에 미리 겁내지 않는다. 착한 소녀 콤플렉스가 아닌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사랑이었다. 끝장내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으니 끝을 보자는 그 가열한 마음. 나는 ‘사랑 진상 짓’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충분히 이해된다. 진상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용순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혔다.

 

용순을 짝사랑하는 친구 ‘빽큐’는 말 안 되는 연애시를 끊임없이 쓴다. 그것을 신준 감독은 ‘쭈글미’라고 표현하던데, 참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웃음보 만발한 연애시들이었다. 용순의 ‘체육’ 사랑은 끝까지 가는 것이고, 빽큐의 ‘용순’ 사랑은 절대 끝내지 않고 곁에서 맴돌기만 해도 좋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같은 형태가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 장면, 사랑 때문에 난장판을 치고 난 후 홀로 학교 운동장을 찾아가 쉬지 않고 달릴 때 용순 뒤의 햇살은 눈부셨다. 끝장낸 사랑은 그러니까 끝난 것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용순의 사랑은 끝났다. 온몸이 쓰라려도 용순이 끝낸 것이니. 사랑은 끝나도 햇살은 반짝였다. 용순은 곧 스무살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이원> 저8,100원(10% + 5%)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의 세계에서는 확정적이고 단단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은 흘러내리고 섞이고 유동적이다. 고정되고 확실한 것은 없다. 기계와 몸이 뒤섞이고, 사물은 서로 경계나 구분 없이 침범하고 변환한다. 남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와 변화를 위한 사건과 움직임뿐이다. 시의 언어들은 대상을 지시하는 기..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가가 형사 시리즈’ 최신작

호화 별장지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범인이 자수하면서 해결되는 것 같지만, 범행 과정에 관한 진술을 거부한다. 진상을 밝히고자 가가 형사가 나선다.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서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선보이는 전통 미스터리 소설로 여름의 열기를 식혀 보시길.

변화의 흐름을 잡아라!

이코노미스트 홍춘욱 박사가 선정한 글로벌 경제 이슈를 담았다. 다가오는 미국 대선 이슈부터 부활하는 일본과 떠오르는 인도까지. 14가지 핵심 토픽을 정리해 세계 변화의 흐름을 한눈에 바라본다. 급변하는 세계의 변곡점에서 현명하게 대응하고 부의 기회를 만들어보자.

삶에 역사의 지혜를 들여오다

선택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을 때 우리에겐 역사가 필요하다 더 깊어진 통찰과 풍부해진 경험으로 돌아온 최태성 저자의 신간.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넘어 삶에 역사의 지혜를 들여오는 방법을 다룬다. 역사에서 찾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단단한 가치는 여전히 역사의 쓸모를 증명한다.

성적이 오르는 아이의 비밀은 어휘력!

초등어휘일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30만 학부모 멘토 이은경쌤이 엄선한 10대가 꼭 알아야 할 국어 교과서 문학,비문학 속 필수 어휘! 교과서 속 처음 접하는 '낯설고 생경한 어휘' 때문에 공부가 어려운 아이들에게 공부의 기본기가 되어 줄 어휘력! 하루 10분, 하루 1장 씩 자연스럽게 익혀 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