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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서 도망치지 않은 여자들

<나는 부정한다>와 <언노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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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나는 ‘지적인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누군가를 ‘지적인 사람’으로 부르듯이. 지식을 어설픈 자의식으로 걸치지 않고, 그 지식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현실의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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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한 장면

 

데보라와 제니는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다. 이 매력이란 깊은 존경과 감탄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부정한다>의 주인공 역사학자 데보라와 <언노운 걸>의 의사 제니.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다. 매력이란 깊은 존경심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김연수 작가가 어떤 소설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해 쓴 글을 패러디했다. 데보라와 제니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의연함이랄까, 당당함이랄까,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 약자에 대한 부드러운 배려, 강자에 대한 늠름한 대응이 인간의 존엄을 일깨웠다. 
 
<나는 부정한다>는 1996년에서 2000년 사이,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영국의 명예훼손 재판 실화 영화다. 4년간 32번 공판, 334페이지 판결문을 남긴 역사적인 재판이었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얼치기 부인론자 데이빗 어빙은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학자 데보라를 고소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국 특유의 법 때문에 데보라는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데보라는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슬픔에 뜨거운 가슴으로 공감하는 사람. 그러나 고의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이빗 어빙에게는 무서울 만큼 냉철하다.
 
명예훼손이 아님을 밝혀야 하는 법정에서 피고 데보라는 변호사의 충고로 침묵을 지킨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변호의 말을 퍼붓는 게 아니라 왜곡 사실을 날카롭게 차갑게 논증하는 변호사를 지지하고 협조하는 학자적 태도를 유지한다. 승리를 위해 침묵해야 할 때도 있는 법. 그녀는 날뛰는 승냥이 같은 부인론자를 피하지 않고 가장 품위 있는 자세로 깨부순다.
 
이 영화를 나는 ‘지적인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누군가를 ‘지적인 사람’으로 부르듯이. 지식을 어설픈 자의식으로 걸치지 않고, 그 지식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현실의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가는 것. 자신을 무고한 사람에게 늠름하게 대처하는 데보라에게 감화되었다.
 
영화 속 이런 대사는 내 삶을 그대로 비집고 들어온다.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 이제 그 슬픔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자료 조사에 밤새 매달리는 로펌 신입 여성에게 그 애인이 묻는다. 답은 명확하다. “이게 슬픔으로 끝날 일이야?” 세상이 바뀌어도, 슬픔이 희석되어도, 사는 동안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마주해야 할 일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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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언노운 걸>에도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의사 제니가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이제 모든 일이 끝났으니 내버려두라는 가해자에게 말한다. “끝난 게 아니니 우리가 이렇게 괴롭겠죠.”
 
제니는 누구인가. 제니는 의료보험만으로 진료 받는 소시민을 위한 작은 병원을 임시로 맡은, 그러나 곧 유명 메디컬센터로 옮기기로 되어 있는 유능한 의사다. 어느 날, 진료 시간 이후에 벨을 울려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이름 모를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삶이 바뀐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그녀는, 연고 없이 묘지에 파묻히는 소녀의 이름이라도 찾아주고자 작정하고 나선다. CCTV 속 벨을 누르는 소녀의 정체를 찾아가며 이주자이며 유색인종, 미성년자이면서 몸 파는 이 소녀에 대한 연민은 깊어간다. 불법 체류 중인 이민자 소녀에게 부당한 일을 시켰던 남자, 그리고 소녀가 원하지 않던 성적 착취를 가한 남자들은 제니를 협박해온다.
 
제니는 그 협박을 놀랍도록 침착하게, 슬픔을 간직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가해자를 설득한다. 잠시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털어버릴 가책이 아닌, 제스처가 아닌 행동. 인간다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제니에게 난 반해버렸다.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시 쓰고 싶다.
데보라와 제니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간’이다. 이 매력이란 깊은 존경과 감탄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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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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