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상처 받지 않고는 뭔가를 배울 길이 없더라”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는 도전해보길
조금 촌스러워 보여도 모르면 바로 묻고, 다가가고 싶으면 상처 받을지라도 먼저 말을 걸어보려고 해요.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안 오니까요. 더 아이처럼 덜 꾸미고 말하는 법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점점 더 편안해졌어요.
막 40대가 되었다. 훨씬 편안해졌다. 정여울 작가는 그 편안함의 정체를 ‘솔직함’에서 찾았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옹송그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거짓에 다름 아니었다. 점점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 그는 이제 예전보다 자신을 훨씬 더 좋아한다. 변화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고,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게 좋다. 정여울 작가는 친구들에게 종종 말한다. 능력은 ‘오버’를 통해서만 길러진다고.
놀라운 일이다. 나이 듦과 도전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이 듦과 젊음은 공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여울 작가의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은 예민하고, 외롭고, 초조하고, 고집스러웠던 젊은 시절을 지나온 작가가 “힘들게 깨달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덜 힘들게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글이다. 그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이 부디 자신을 더 온전하게 받아들이길, 삶을 더 다채로운 빛으로 채우길, 아직 완성형이 아니니 좀 더 자신을 깨고 나가보길 권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며 얻은 놀라운 깨달음. 그것들을 정여울 작가는 “넉넉한 시골인심으로, 내가 아는 것을 아낌없이 다 퍼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서 얻은 놀라운 통찰들이, 내게도 남았다.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프롤로그’에서 30대에 맞은 변화 세 가지를 언급하셨잖아요. 이제 막 40대를 맞았는데요. 지금 맞이하고 있는 변화 혹은 감상에 대해 먼저 묻고 싶어요.
20대에서 30대가 될 때는 걱정이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20대에는 서른이 굉장한 나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서른이 너무 어렵고 무서운 느낌이 많았어요. 그런데 마흔은 생각보다 훨씬 덜 두렵고 편했어요. 약간 포기한 느낌도 있고요.(웃음) 젊다는 것이 주는 부담감이 있죠. 30대는 일단 주변에서 젊다고 보아주는 나이잖아요. 반면 40대는 위아래로 편해져요. 좀 더 균형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마흔 이후의 삶은 더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예전에는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너무 고통 받은 것 같아요. 그러나 지금은 뭔가를 해내려는 피곤한 자기 착취로부터 벗어나 조금씩 느리게 좀 더 행복한 나를 만들어가자는 마음이에요. 오히려 그때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그러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져요.
그때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들이란 뭘까요?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경험 때문에 가능한 거거든요.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경험으로 인한 거예요. 그 전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까 되네, 이런 것들이 30대에 많이 형성이 돼요. 그러면서 좀 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죠. 그렇게 스스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 전보다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그것이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책으로 전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이기도 할 것 같아요.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40대가 되어보니 이렇더라, 하면서 많은 응원을 건네고 있거든요.
많은 분들, 특히 30대 분들은 고민이 비슷하더라고요. 사회에서 약간은 자리를 잡았지만 불안하죠. 그렇지만 예전 30대와 지금 30대의 다른 점도 있어요. 지금 30대는 인생을 즐길 줄 알거든요. 아등바등 살기보다 삶 자체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저는 그 마음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그걸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삶이 훨씬 풍요롭고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졌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 부분을 더 호소하고 싶었어요. 제가 힘들게 깨달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덜 힘들게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컸죠.
삶의 가치가 많이 변화하고 있는 것 같긴 해요. 과거에 비해 훨씬 현재와 행복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요.
여전히 미디어에서는 성공하는 법, 노화를 방지하는 법(웃음) 등을 중심으로 억지로 나이 들지 않게 만들려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더 나이 듦을 슬프게 하는 지름길인 것 같고요. 나이는 들되 더 아름답게 나이 드는 법을 생각하면 훨씬 더 우리 삶이 멋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능력은 ‘오버’를 통해서만 길러진다
무엇보다 핵심은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내용일 것 같아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자고 여러 번 말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알기도 쉽지가 않잖아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알아야 하는데요. 그건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제대로 알 수 있더라고요.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만남으로만 한정을 해버리면 자기를 진정으로 실험해볼 수 없게 되죠. 제 경우 책을 쓰고, 여행을 하는, 나를 던져야만 하는 일들을 하면서 바뀐 것 같아요. 예전의 저는 ‘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있었어요.(웃음) 그게 나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 제일 좋고요. 그런 게 너무 좋아서 제 가능성을 많아 닫아버렸던 것 같아요. 특히 20대에 많이 그랬죠. 30대에는 그런 특성을 받아들이고 바깥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책도 가장 많이 썼고, 여행도 일처럼 많이 다녔고요. 특히 강의가 저를 많이 바꿨어요. 강의는 진짜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만나지 않고 글만 쓸 때와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질문 받을 때가 전혀 달랐어요. 훨씬 배우는 게 많더라고요. 독자들과 대화하는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혼자 있을 때 제일 좋다는 말 공감해요.(웃음)
저도 그랬는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훨씬 좋구나, 깨달았어요. 예를 들어 바이올린 솔로보다 4중주를 더 좋아하거든요. 그런 것처럼 제 삶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혼자 빛나기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오랫동안 천천히 만들어나가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요. 그게 책을 만들고 강의를 하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길인 것 같아요. 그것을 통해 배운 것들을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죠.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들한테 하는 말이 있는데요. 능력은 ‘오버’를 통해서만 길러지는 것 같아요. 오버는 위험하기도 하죠. 자기 자신을 던져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만 하다보면 삶이 바뀌지 않더라고요. 약간 못할 것 같은 것들을 해보면 좀 달라요. 주변에 40대에 수영 배우는 분도 있고, 자전거 여행을 하는 분도 있어요. 약간 힘들면서도 내가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자신을 못 믿어서 하지 못한 것들을 한다면 삶이 더 풍요로워져요. 대부분은 잘할 것 같은 것만 하거든요. 그러다보면 비슷한 쪽으로만 능력이 발달해요. 어떤 면에서는 점점 더 경직되는 거죠.
첼로를 배우신다고 들었어요. 첼로 연주를 통해 얻은 깨달음도 눈에 띄더라고요.
첼로를 잘할 줄 알았어요.(웃음) 진짜 어렵더라고요.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것 중 하나였어요. 4년 정도 됐는데 생각보다 많이 안 늘어요. 창피한 수준이죠. 그렇지만 선생님과 2중주를 하며 배우는 게 정말 많아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어요. 우리는 항상 언어로만 대화하잖아요. 그런데 음악으로도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언어를 뛰어넘는 소통이 있다는 걸 느꼈을 때 굉장히 희열을 느꼈어요. 그렇게 멋지지 않아도 스스로 충만한 느낌, 그게 참 좋아요. 여러분도 조금 나를 오버하는 것, 본래의 가능성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는 곳에서 한 번 도전해보시면 좋겠어요.
성인이 된 이후 유독 효율성, 생산성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았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그런 도전을 학창시절에는 많이 했는데 말이죠.
저도 30대 초반까지는 뿌리 깊은 모범생이었던 것 같아요. 갑갑한 인생이었던 것 같은데요. 혼자 여행을 다녀보고 알게 된 게 많아요. 함께 열 번 여행 다니는 것보다 혼자 한 번 여행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걸 배우더라고요. 일단 고생을 하게 되고요. 자기의 밑바닥과 최고점을 보게 되죠. 또 짐이 많으면 힘들기 때문에 점점 내 맨 몸으로 할 수 있는 걸 생각하게 돼요. 훨씬 더 강해지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사회가 요구하는 강인함이 아니라 내적으로 강인해지는 느낌, 그 감성이 참 좋았어요. 점점 나이 드는 게 재미있어지기도 했고요. 삶이란 참으로 정직해서 내가 쏟아 부어야만 뭔가가 오지 외부에서 공짜로 좋은 자극이 오지는 않더라고요. 찾아 나서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그러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하고 때로는 싫은 것도 해봐야 해요. 예전에는 상처받기 싫어서 옹송그리고 있었는데 상처 받지 않고는 뭔가를 배울 길이 없더라고요.
감동을 느끼는 것도 능력
스스로를 ‘후회중독자’라고 표현했는데요. 개중에는 좋은 후회라고 할 만한 것도 있겠죠?
보통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많이 노력하잖아요. 상처와 비슷해요. 상처 받지 않으려는 것, 후회하지 않으려는 것이 너무 과도한 방어기제더라고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거든요. 저 사람은 방어기제가 높구나, 하고요. 그러면 점점 날 어렵게 생각하고, 날 안 건드리게 돼요. 점점 고립되는 거죠. 후회와 상처를 자꾸 피하려다보면 점점 약해져요.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누군가 상처를 줬을 때 대화를 시도하면 대놓고 상처주진 못하더라고요. 꿈쩍도 안 하고 도망치려 하고 상처 받은 모습을 보여주면 더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실 못된 마음이죠. 하지만 대화를 시도하면 그 속에서 서로 마음을 열게 되더라고요. 상처를 준 사람에게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거죠. 그랬을 때 결과가 훨씬 좋았어요. 예전보다 성장했다고 느끼고요.
성장은 달리 표현하면 건강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모든 것이 생각보다 훨씬 말랑말랑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사회는 단단한 장벽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무언가를 하려는 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함부로 달려들었다간 죽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요. 위험요소를 강조하다 도전을 못하게 되죠. 그런데 사회가 생각보다 빈틈이 많아요. 또 사람의 마음도 그렇고요. 보이는 것보다는 참 틈새가 많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 틈새에 조금씩 스며들어가는 게 글쓰기와 예술, 소통의 힘이란 생각도 하고요.
한편 한 스님의 말, ‘친한 사람을 멀리하고, 어렵고 불편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하라는 게 알쏭달쏭하면서 무척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작가님의 입으로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생각하면서 성장하게 되는 말이죠. 그게 ‘화두’인 거죠. 스님의 이 말씀은 마음의 관성을 벗으라는 말씀이에요. 우리 마음의 관성은 편한 사람과 계속 가까이 지내고 싶어요. 그들은 내 말에 쉽게 공감하는 사람들이죠. 눈을 마주치고 살아온 사람들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만 만나다보면 언어발달도 떨어져요. 단어도 생각 안 나죠. 개떡 같이 말해도(웃음) 찰떡 같이 알아들으니까요. 자극을 피하게 되는데요. 반면 친하지 않고, 사실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머리가 좋아지는 거예요. 온갖 언어와 근거를 다 들어 그를 설득하려고 하고요. 그러다보면 내 자신이 발전해요. 더 성숙해지고요.
이른바 ‘꼰대’라고 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변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죠.
자기가 모르는 세계를 못 견디는 거예요. 세계를 모두 자기에게 친숙한 것으로 환원시킬 뿐이죠. 다 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노화거든요. 모든 것에서 경이를 느끼고 감동을 느끼는 것도 능력이더라고요. <윤식당>의 윤여정 씨를 보면서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여유롭고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 듣는 열린 모습 때문인 것 같아요. 그렇게 늙어가는 게 정말 쉽지 않아요. 좋아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저도 굉장히 힘들어요. 그런데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바뀌더라고요. 반대로 해보려고 노력하게 되고요. 스님의 이 말씀은 제게도 정말 큰 도움이 돼요.
‘나잇값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구절도 많이 와 닿거든요.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바라는 점도 있을 것 같아요.
나이 많은 선배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죠. “편하게 하세요.” 그런데 그 말도, 듣는 후배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편할 수 있거든요. 그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편안한 분위기가 되도록 이쪽에서 먼저 노력을 해야 해요. ‘저는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하는 것보다 자유롭고 탈권위적인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때 저쪽에서도 믿어줄 수 있게 되죠. 먼저 내가 편안해져야 상대방도 나를 편안히 여기게 되니까요. ‘어린 사람들이 나를 불편해하는 것 같다’는 눈치조차 없는 분들도 많죠. 자신이 아주 유머러스하고 농담도 잘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저쪽에서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억지로 웃어주는 건 아닐까’ 한 번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아요. 이제는 명령하거나 지배하고 통제하는 리더십의 시대가 아니에요. 배려와 공감의 리더십만이 타인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일 수가 있어요.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의지가 중요할 것 같아요.
무상성을 ‘모든 것이 덧없다, 그래서 허무하다’는 의미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상성이란 바로 ‘이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음으로써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156쪽)
화두라고 할 만한 대목이 또 하나 있어요. 바로 ‘무상성’에 관한 이야기였는데요. 유리잔이 이미 깨졌다고 생각할 때 유리잔이 더욱 소중해진다는 이야기는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생각인 것 같아요.
무상성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에요. 저도 다 이해하진 못했는데요. 『트라우마 사용설명서』에 나온 말을 읽으면서 세계관이 확 바뀌더라고요. 우리는 더 오래가는 것을 찾아다니잖아요. 하지만 최고의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그 사람과 언젠가 헤어지겠다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 이 순간이 더 소중하다는 걸 알게 돼요. 참 어렵죠.(웃음) 아름다운 유리잔을 보면서 이게 이미 깨졌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놀라운 전환이죠. 그렇지만 그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이미 날 떠났다고 생각해보면 관계가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무상성이란 말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이에요. ‘구방심(救放心)’이라고 하잖아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모아주는 말, 그런 말 같아요.
독립, 자존감, 습관, 용기 등 여러 단어들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그 중 꼭 하나를 가져갔으면 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 있나요?
책에는 안 나오지만 책 전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정직함, 솔직함이에요. 20-30대에는 연기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상처 받아도 안 받은 척, 관심 있는데 없는 척하면서 자존심을 지키려고 한 적이 많았는데요. 그런 게 아무 소용없더라고요. 30대 중반부터 변한 것 같아요. 솔직하지 못한 건 결국 삶에 진실하지 못한 것일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딱 생겼어요. 조금 촌스러워 보여도 모르면 바로 묻고, 다가가고 싶으면 상처 받을지라도 먼저 말을 걸어보려고 해요.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안 오니까요. 더 아이처럼 덜 꾸미고 말하는 법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점점 더 편안해졌어요.
콩나물을 꾹꾹 눌러 담은 느낌
편안해졌다는 감각이 많이 전해져요. 타인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도 즐겁고요. 그런가 하면 타인에 대한 시선을 확장시키면 사회에 대한 시선으로 가닿잖아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덕목은 뭘까요?
나는 별로 특별한 힘이 없으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점점 더 나쁘게 만들 수 있어요. 촛불시민들이 해낸 일을 보세요. 처음에는 촛불 하나로 시작되었잖아요. 저마다 ‘이런 나라에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촛불을 들어 내 마음을 표현하자’라는 소박한 믿음으로 광장으로 나갔는데, 몇 년 동안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더 나빠지기만 하던 것들이 이제 가능해졌어요. 기적 같은 일이에요. 하지만 결코 신비로운 기적이 아니죠.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 촛불을 응원하는 사람들 모두가 하루하루 조금씩 만들어낸 지극히 현실적인 힘이지요. 우리 삶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하겠어?’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도 단 한 사람이 매일매일,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정말로 세상이 바뀌어요. 그 한 사람의 힘을 믿을 때 나 자신뿐 아니라 내 주변의 세상, 우리가 속한 더 커다란 세상도 바뀔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글을 쓰고 강연하는 일을 좋아하신다고 했지만 힘들 때도 있을 텐데요. 슬럼프에 빠지신 적은 없나요?
슬럼프 속에 뭔가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해요. 슬럼프를 제거하려고만 하지 말고, ‘왜 슬럼프가 왔을까’를 곰곰 생각해 보면 그 속에 뭔가 해답이 있을 때가 많아요. 지나치게 자신을 혹사시켜왔다면, 그 자기착취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거죠. 내 삶에 대한 불만족, 과거의 실패에 대한 지나친 보상심리, 반드시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합쳐져 슬럼프를 만들어낼 때가 많아요. 방아쇠는 외부에 있는 경우가 많지만, 슬럼프가 심화되고 확장되는 회로는 내 안에 있을 때가 많거든요. 때로는 ‘반드시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보다는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자’라는 소박한 생각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와요. 또 어떨 때는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도움이 되기도 해요. 전혀 긴장하지 않은 상태, 전혀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는 상태에서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요. 어느 정도의 긴장, 적당한 정도의 슬럼프까지 즐기려고 노력해요.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요.
어떻게 피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정말 피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즐겨보자, 라는 약간은 자포자기적인 상태가 오히려 도움이 될 때도 있어요. 그리고 되도록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그 일 말고 ‘잠깐 다른 일에 몰두해 보자’라는 생각도 도움이 되지요. 저는 몇 시간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옛날 영화를 보기도 하고, 아무런 목적 없이 산책을 하기도 해요. 내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는 시간을 가져보는 거죠. 그렇게 조금씩 슬럼프와 친해지고, 슬럼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슬럼프와 대화하고 놀아본다는 생각으로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이 도움이 되었어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으신가요? 이 책을 만날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왜 열심히 해도 일이 안 풀리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왜 세상은 내가 노력하는 만큼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고 억울하고 서운할 때요. 그때 친구가 필요한데 친구에게도 의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책이 가장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요. 책과 친구가 되면, 서운할 일이 없거든요. 그저 책 속의 메시지를 내가 조금씩 받아들이면 돼요. 책 속의 인물과 가상의 대화를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외로움을 스스로 극복하고 싶은 분들이 이 책을 친구로 삼았으면 좋겠어요. 그림은 많고 글은 조금인 아주 느슨한 책들의 유행에 실망한 한 독자가 제 책을 이렇게 표현하셨더라고요. “인심 좋은 할머니가 하나라도 더 주려고 콩나물을 꾹꾹 눌러 담은 느낌”이라고요. 그 표현이 그렇게 고맙고 따뜻하더라고요. 저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넉넉한 시골인심으로, 내가 아는 것을 아낌없이 다 퍼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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