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홍승찬의 클래식 대가를 만나다
위스키를 만든 정신으로 지은 산토리홀
최고의 공연장을 만들기 위한 조건
결국은 비전의 문제이고 원칙,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남달라서 스스로 자랑스럽고,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로 존중과 인정을 받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산토리홀 대공연장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가장 대표적인 공연장이라면 산토리홀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위치와 외관은 물론이고 내장도 으뜸이지만 무엇보다 음향이 뛰어나 콘서트홀로는 세계 유수의 공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 호사가들이 더러 하필이면 술을 만드는 회사가 이런 기념비적인 공연장을 만들어 이름부터가 그렇다는 식의 말을 하기도 하지만,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일 따름이다. 산토리홀도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공연장이지만, 그것을 만든 산토리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위스키를 만들어 세계에 일본인들의 자부심을 드높인 자랑거리였다.
애주가들이 아니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위스키를 독자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를 통 털어 다섯 나라 밖에 없다고 한다. 원조 격인 스코틀랜드와 이웃나라 아일랜드가 있고 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새로 세운 나라 미국과 캐나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아시아 국가 중에는 처음으로 위스키를 만들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연구하고 노력한 결과 앞선 네 나라와 견주어 전혀 품질에 있어 뒤처지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그들을 능가한다는 평가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도 위스키를 만드는 회사가 있는데 무슨 말이냐는 반응이 있겠지만 우리나라가 생산하는 위스키는 모두 원액을 수입해서 병에 담고 포장하여 판매하는 회사일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위스키 수입국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일찍이 위스키 자체 생산에 성공하여 다른 세계적인 브랜드들과 경쟁하고 있는 산토리의 선견지명과 집념은 실로 일본의 자랑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산토리홀은 우리나라의 예술의 전당보다 2년 앞서 완공했다. 지난 2011년 25주년을 맞이했고 그 때 대대적인 기념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공연 내용을 보면서 또 한 번 산토리의 남다른 집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개관 이후 당시까지 세계 여러 나라 작곡가들에게 위촉하여 초연했던 세계 초연 곡들만 모아서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어쩌면 세계 최고의 품질을 가졌으나 최초가 아니라 늘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산토리가 산토리홀을 통해 세계 최초의 한을 풀고 있다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세계 최고의 공연장을 만들고 인식시키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전략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최고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데는 여러 가지 많은 변수들이 수도 없이 작용하여 쉽게 가늠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최초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최초는 곧 유일이고 그것은 또한 최고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들 왜 이렇게 단순한 해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인지 의아하기만 하다. 이미 거듭된 세월과 겹겹이 쌓인 남다른 업적들로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공연장들은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뒤늦게 만들어 열심히 그들을 쫓아가야 하는 입장에 있는 그 수도 없이 많은 공연장들이라면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했을 텐데 실행에 옮기지 못한 까닭이 궁금하기만 하다. 혹시나 재정이 뒷받침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보다는 신작을 무대에 올려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여러 가지로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신작으로만 채우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이유들이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 결국은 비전의 문제이고 원칙,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남달라서 스스로 자랑스럽고,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로 존중과 인정을 받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든 그저 급히 만들어 돌리느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년이면 예술의 전당이 3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나름 여러 가지 뜻 깊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겠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에서 산토리홀의 25주년을 돌아보았다. 그들처럼 처음부터 남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고민했으면 모를까 아니라면 차리리 지난 세월은 덮어두고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했으면 싶다. 성과를 포장하고 앞세우기보다 부끄러운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거기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바꾸었으면 좋을지 묻고 답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만들고 누려야 할 문화와 예술이, 그로 말미암은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그리고 그런 모습을 위해 예술의 전당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모색하는 계기였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음악학과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서양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전공 교수, (사)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사로 일하고 있으며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