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호 커버 스토리] 류시화 “덜 움츠리고 덜 비난하고 더 많이 예찬하라”
<월간 채널예스> 4월호 커버 스토리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펴내
류시화는 “다만 길 위에서 당신과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문학의 길을 걷겠다고 노숙자가 되자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시를 쓰고 책을 읽느라 학교는 낙제했다. 국문학을 공부하고 국어 교사가 되는 행운을 얻었으나 포기하고 잡지사에 들어간다. 하지만 반년이 안 돼 퇴사했다. 이후 클래식 음악카페를 열었지만 석 달 만에 문을 닫았다. 출판사에 취직했다가, 바바 하리 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 원서를 읽고 그 책을 번역하겠다는 일념으로 회사에 사표를 냈다. 이후 뉴욕으로 떠났다가 인도의 명상 센터에 머물다가 서귀포에서 두 해를 살다 또 서울로 왔다. 지금도 한 해에 서너 번 인도를 여행한다.
류시화는 자신의 삶을 두고 “방황한다고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인간은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다. 봄이 자꾸 머뭇거리던 3월의 한낮. 류시화 시인과 마주했다. 그는 선택을 앞둔 순간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는가?’를 생각한다고 했다. 불확실한 시대에 한 권의 책을 쓰고 남기는 일. 류시화는 “다만 길 위에서 당신과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게 독자란, 글을 나눠 읽는 동지
20년 만에 펴낸 에세이다. 30대 초반에 쓴 산문집은 바로 절판을 시켰다.
내가 깊이 경험하지 않은 것,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문학적 수사를 동원해 글을 썼다는 자책감이 컸다. 이후 ‘나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쓰자’고 결심했다.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해 산문을 몇 편 썼는데, 당시 우리를 가르치시던 소설가 황순원 교수께서 이런 말씀을 했다. “시는 젊어서 쓰는 것이고, 산문은 나이 들어서 쓰는 것이다.” 시는 고뇌를, 산문은 인생을 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 산문을 쓸 만큼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더 나이가 들어 ‘경전’을 쓰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저 시인이고 떠돌이 여행자일 뿐이다.
평소 인터뷰를 안 하기로 유명하다. 독자들을 따로 만나는 행사도 하지 않았다.
강연과 인터뷰는 거의 사절해 왔다. 거절하는 것이 곤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나는 글 쓰는 사람이지 말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렇다. 지금 이 인터뷰도 여러 차례 거절했지만, 출판 시장이 불황이기 때문에 도와줘야 한다는 요청에 등 떠밀려 하게 됐다. 이집트 사막에서 수행하던 초기 기독교 교부 중 한 명은 사람들이 찾아올수록 더 깊은 사막으로 달아났다. 세상에 나와서 좋은 말씀을 해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추하고 보잘것없기 때문에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이다. 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나의 덕행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약점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내 글이 세상에서 읽히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때가 있다.
시인으로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독자의 관심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작가이지만 ‘독자’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낀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저자와 끈끈한 동맹 관계에 돌입한다. 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책은 실패한 것이다. 내게 독자란, ‘글을 나눠 읽는 동지’다. 시집과 번역서를 세상에 내놓을 때 나는 같은 공간대와 시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적어도 천 명은 내 생각과 느낌에 공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사랑은 곧 그 공감에서 출발한다. 알베르 카뮈는 “빗속에서 담배를 나눠 피울 때 우리는 동지애를 느낀다”라고 썼지만, 나는 내 글을 읽는 사람을 만날 때 같은 인간 존재로서의 동지애를 느낀다. 위대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여행을 하다가 칠레의 탄광에 들른 적이 있다. 그때 갱도에서 일하던 얼굴이 새까매진 광부가 다가와 네루다를 와락 껴안으며 외친다. “당신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런 동지가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굳건해진다.
이 산문집은 골방에서 쓴 글이 아니다. 따라서 거리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행자로서 만난 사람들이 당신에게는 스승이 아닐까 싶다.
러시아 출신의 게오르기 구르지예프는 20세기 유럽인들의 의식 변화에 큰 영향을 준 신비가이며 영적 스승이다. 그는 서양 문화권이 명상 교사나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다. 심오한 사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가 미스터리였는데, 훗날 어떤 이가 그를 가르친 스승들을 추적해 책을 썼다. 놀랍게도 그의 스승들은 구두 수선공, 향수 판매상, 마을의 숨어 사는 노인 등이었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낯선 여인, 혹은 처음 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그럴 때 우리는 언어가 달라도 삶에서 똑같은 경이와 슬픔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똑같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무너지거나 절망한 적이 많다. 그럴 때 나를 일으켜 세워 준 사람들,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가리켜 보인 이들 모두가 나의 스승이다.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다”라고 했다. 주체적인 인생을 살라는 뜻인가?
“우리는 우리가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행이 우리를 만들어 나간다”는 말에 동의한다. “나는 계속 길을 감으로써 가야 할 곳을 발견한다”라는 말도 내가 좋아하는 글귀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는 명언도 있다. 자신의 편견과 판단 기준을 들고 여행하는 사람은 전보다 더 폐쇄적이 되어 돌아온다. 인도 여행 중에 힌디어를 배울 때, 어떤 새로운 단어를 알고 나면 그 단어가 일상 대화에서 자주 들린다. 없었던 단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거기에 있었지만 내 귀가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매일 힌디어 단어들을 새롭게 알듯이 여행은 세상에 대한 이해의 원, 인식의 원, 정신의 원을 넓히는 일이다.
근작이 2015년에 출간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이다. 시를 더 많이 발표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시인은 한 가지 딜레마에 빠진다. 시를 쓰면서 동시에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다. 이것은 다른 직업군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민이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더 많은 물건을 만들기를 원할 것이고, 집 짓는 사람은 더 많은 집을 지으려고 할 거다. 그러나 유독 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시인은 밤을 새워 시를 쓰고서도 스스로 단어와 행들을 줄이고, 마침내는 폐기해 버린다. 에밀리 디킨슨이 평생 시만 쓰고 1,770여 편의 시를 썼으면서도 작품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던 것도 단순히 그녀의 개인주의적이고 비사교적인 성격 탓만이 아니라 그런 결벽증에 기인한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내가 제3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낸 것이 5년 전인데, 그 시들도 350여 편의 미발표시 중에서 고른 것이다.
평소 시를 종이에 쓰지 않고, 입속에서 수없이 중얼거리면서 외워 쓴다. 메모는 전혀 하지 않나?
메모를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계속 소리 내어 암송하면서 시를 쓴다. 인도의 기차 안에 서는 이 방법이 매우 용이하고 효과적이다. 뜻 모를 말을 계속 중얼거리는 나를 머리가 이상한 자나 만트라를 외는 명상 수행자로 여기기 때문에 나도 사람들을 경계할 필요가 없다.
최근에 암송해서 쓴 시가 있나?
‘선운사 동백’이라는 제목의 시다.
당신과 나
그 사이에
아무도 없었던 적이 있었다
이 붉은 동백만이
모든 꽃은 다음에 피는 꽃에
지는 법
지금은
바닥에 떨어진 심장처럼
붉은 이 동백만이
당신과 나
그 사이에
구호와 선동이 난무하는 시대,
시가 더 많이 필요하다
당신에게 문학은 어떤 의미를 갖나?
문학은 ‘은유’다. 은유로 말하는 것이 시이며 문학이다. 은유는 그 안에 많은 층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이 문학의 은유가 주는 울림과 깊이다. 직설적인 표현과 구호가 지배하는 사회는 획일적이고 공격적이며 깊이가 얕다. 은유가 사라진 사회는 비극이다. 사람들이 은유를 이해할 인내와 상상력을 잃어버릴 때, 그들이 선호하고 열광하는 지도자들은 대개 직설적인 구호를 남발하고 돌직구를 날리는 선동꾼이다. 작가와 시인들은 여기에 동참하지 말아야 한다. 은유는 풀꽃이고, 강의 물결이고, 철쭉의 붉음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세계와 영혼의 세계도 은유로 가득 차 있다. 인도 시인 K. 사치다난단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의 시선은 돌/ 그것이 유리처럼 나를 깨뜨린다’
최근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예술인은 블랙리스트, 즉 위험인물 명단에 오른다. 이는 가장 힘없는 자가 예술인이면서 가장 강한 자가 예술인이라는 증거다. 말 그대로 ‘동태가 수상한 자’가 곧 예술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을 수상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가치관, 진행 방식 등을 째려보는 거다. 어느 정권에서든 편애를 받는 예술인은 예술인이기를 포기하고 기생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예술인이 가장 멀리해야 하는 집단이 정치인, 권력자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일화가 있다.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혁명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간다. 죄수들이 말뚝에 묶이고 방아쇠가 당겨지려는 순간, 한 병사가 “중지!”를 외치며 달려온다. 황제의 특별 감형이 내려진 거다. 그렇게 해서 죽음 직전에 갑자기 자유인이 된다. 같이 밧줄에 묶여 있던 친구 하나는 이 일을 겪고 나서 정신이상자가 돼 버리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순간에 갑자기 살아난 그 순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남은 생을 문학에 바쳐 ‘이미 죽은 사람들이 깨달은 것’을 표현하겠노라고 다짐한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는가 생각했다. 삶은 하나의 선물이다.” 그 결심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 생활자의 수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죄와 벌』 등 불후의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내가 아닐 때가 많다”고 했다. 자신을 잘 아는 것만큼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잘 알 수 있을까?
영화로도 만들어진 미국의 소설가 톰 로빈스의 소설 『카우걸 블루스Even Cowgirls Get the Blues』의 주인공 씨씨는 기형적으로 커다란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난다. 주위에서 손가락을 수술하라고 권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기형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타인들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방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저항한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성형수술을 받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거부한다. 그리고 어느 날 실룩거리는 자신의 커다란 엄지손가락을 보다가 남다른 재능을 발견한다. 즉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히치하이커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거대한 크기 덕분에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세우기만 하면 4차선 반대편의 차들도 멈춰선다. 그래서 그녀는 미국 전역을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하며 새로운 삶을 발견해 나간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세상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지 않는’ 일이다. 또한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이나 기능을 자기 자신이라고 오해하지 않는 일이다. 큰 엄지손가락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따라서 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세상은 결코 말해 주지 않는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자신의 불완전한 부분을 숨겨야만 완전하게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50여 권의 명상 서적을 번역했다.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서 번역한 책이 아니라 직접 선택한 책들이다.
내가 공부하면서 읽은 책 중에서 나 자신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고 마음에 울림을 주는 책을 선정해 번역했다. 나는 의뢰를 받아 책을 번역할 만큼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다. 지금도 책 한 권을 번역하려면 수없이 단어를 찾아야 하고, 장발 머리를 쥐어뜯는다. 세상의 모든 번역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래서 저자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번역가들이 내 옆에 앉아서 나에게 조언을 해 준다고 상상하면서 작업한다. 그런 상상이 원활히 이루어질 때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 오로지 나의 힘만으로 번역한다고 생각했다면 작업이 불가능했을 거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 나는 나 이전에 그 길을 여행한 모든 존재가 내 옆에서 나와 함께 걷고 있다고 상상한다. 마음을 열고 그들의 안내에 따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두려움과 고난이 사라지고 길이 열린다. 그때 나는 더 강하고 세상과 더 연결된다. 혼자라고 여기고, 거부하고 단절할 때 우리는 허약해진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의 표지는 20년 가까이 함께한 디자이너 ‘행복한 물고기’가 맡았다.
본문 편집 역시 15년 넘게 내 창작집과 번역서를 담당해 온 편집자가 맡아주었다. 그들의 올바른 판단과 헌신적인 노동으로 완성된 책이다. 나는 오래된 인연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 많은 것이 변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표지화는 내 부탁을 두말없이 들어주는 일본 판화가 호사카 유코의 작품이다. 나 역시도 젊은 시절에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의 상호의존과 연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자기 중심성이다. 우리는 서로가 있어야만 온전해질 수 있다.
최근 ‘엮은 시집’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1998년에 펴낸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 시초가 됐는데, 몇 차례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던 책으로 알고 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내가 읽은 명상 관련 서적들에서 발견한 시들을 10여 년에 걸쳐 모은 책이다. 처음 이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을 때 반응은 “시를 읽는 독자는 거의 없다” “유명한 시인들보다 무명 시인들의 시가 더 많기 때문에 상품성이 부족하다” 등이었다. 그러다 대학교 후배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겨우 내게 되었는데 1백만 부가 넘게 책이 판매됐다. 이 시집의 성공 이후 많은 엮은 시집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시를 소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구호와 선동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시가 더 많이 필요하다.
예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가장 가난한 사람
여행 중에는 책을 들고 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대신 여행지에서는 책방을 들른다고.
어느 도시에 가든 먼저 그곳의 책방을 들르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특색 있는 책방과 책방 주인을 만나면 그 도시에 대한 인상도 당연히 좋아진다. 인도 델리의 옥스포드 서점이나 북웜(책벌레) 서점, 바라나시의 아시가트에 있는 서점들, 네팔 카트만두의 필그림 서점 등을 좋아한다. 이런 독특한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며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올해 1월, 델리 칸마켓의 서점에서 발견한 심리치료사 토머스 무어의 대표작 『영혼의 돌봄Care of the Soul』은 여행 내내 좋은 독서가 됐다.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나?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심하게 다투고 나서 경솔하게 여자를 비난하고 결별하는 편지를 쓴다.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그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편지를 읽지 말라고 말한다. 여자는 편지를 받고 나서 바로 찢어 버린다. 그리고 호기심을 느껴 휴지통에 버린 편지 조각들을 보니까 남자가 적은 글씨와 단어들이 보인다. 하지만 여자는 유혹을 이기고 휴지통을 비워버렸고, 두 사람은 다시 예전의 사랑하는 관계로 돌아온다. ‘영혼의 돌봄’을 선택한 거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책은 때로는 외롭기도 한 여행의 좋은 동행이 되어 준다. 여행 중의 독서는 그 저자와 함께 다닌다는 상상을 불러일으켜서 좋다. 국내여행도 마찬가지다.
지금 어떤 시집을 읽고 있나?
19세기 우르두 시인 미르자 갈리브의 시집들을 읽고 있다. 무굴 왕조의 마지막 시인이기도 한 그는 산문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그가 쓴 가잘Ghazal, 즉 2행시가 계속 연결된 형식의 시들은 오늘날에도 인도와 아랍의 많은 전통 음악 가수들에 의해 불리고 있다. 갈리브는 종교의 형식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내면에서 신을 발견하라는 것을 노래한 시인이다. 언젠가는 갈리브의 시들을 번역해 보려고 한다. ‘내 손금을 보려고 하지 말라/ 손이 없는 자에게도 행운이 찾아오리니’
번역가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 년에 적어도 한 권은 번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이번 생에 내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여긴다. 성경의 『시편』과 『아가서』를 번역하고 싶고, 인도의 고대 사상서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하고 싶고, 소로우의 방대한 일기도 번역하고 싶다. 이 계획들을 10년 전, 아니 20년 전부터 해 오고 있지만, 매번 새로운 책들에 유혹당해 미루고 있다. 지금은 융 심리학자이며 원형 이론 전문가인 캐럴 피어슨이 쓴 『The Hero Within』을 번역하는 중이다. 우리 내면에는 고아, 방랑자, 전사, 이타주의자, 순수주의자, 마법사 등 6가지 심리적 원형들이 있는데, 이 중 어떤 원형이 자신을 지배하고 어떤 원형이 억압되어 있는지 이해함으로써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다.
현실에 색을 입히는 법으로 ‘예찬’을 꼽았다. “덜 움츠리고 덜 비난하고 더 많이 예찬하라”고 했다. 당신은 세월을 보내며, 예찬의 대상이 달라졌나? 또 덜 움츠리게 되었나? 당신이 감동할 때는 어떤 순간인가?
우리는 나쁜 뉴스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쁜 뉴스’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이미 일어나 버린 나쁜 일들을 의미한다. 세상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나쁜 뉴스가 계속해서 일어난다. 그 나쁜 뉴스들은 우리에게서 삶과 세상에 대한 ‘예찬’ 능력을 앗아가 버린다. 사실 이것이 우리 자신에게는 훨씬 더 나쁜 뉴스다.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심미가인 미셸 투르니에는 산문집 『예찬』에서 ‘볼바시옹volvation’이라는 단어를 소개한다. 이는 고슴도치가 조금만 위험이 닥쳐도 몸을 둥글게 움츠리는 현상을 의미한다. 고슴도치식의 방어법이다. 인간 역시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닫는 반사적인 행동에 길들여진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쁜 뉴스가 아니다. 어김없이 봄이 오고, 세상의 모든 곳에서 일출과 일몰의 릴레이가 이어지고, 파도가 쉼 없이 춤추는 한 우리는 수많은 예찬할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 예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예찬과 행복은 비례할까?
여기 좋은 일화가 있다. 삶과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 제자에게 어느 날 영적 스승이 소금 한 줌을 물에 타서 마시게 한다. 그리고 묻는다. “맛이 어떤가?” 제자가 말한다. “너무 짜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스승이 근처 호숫가로 제자를 데리고 가서 호수에 소금 한 줌을 뿌리고는 호수의 물을 한 모금 마셔 보게 한다. 그리고 맛이 어떠냐고 묻자, 제자가 말한다. “시원합니다.” 스승이 “소금 맛이 나느냐?”고 묻자 제자는 “안난다”고 대답한다. 삶과 세상의 문제는 소금과도 같다. 소금의 양은 같지만, 우리가 얼마만 한 넓이의 마음으로 그것을 인식하는가에 따라 불평의 정도가 달라진다. 스승은 제자에게 조언한다. “유리잔이 되지 말고 넓은 호수가 되라.”
아마 책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인터뷰를 읽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시를 읽으시길 바란다. 그것이 ‘영혼의 돌봄’이다. 우리의 눈은 활자를 읽어 내려가지만, 그때 우리의 영혼은 세상을 읽어 내려가고 풍요로워진다. 나는 우리가 “영혼을 가진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영혼”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인도의 라자스탄 지역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낙타 사파리를 하면서 사막에서 텐트를 치고 하루나 이틀 자본 적이 있다. 자정 너머 밖으로 나오면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단단하게 못과 콘크리트로 고정된 지붕, 단단히 동여맨 관념들에서 벗어나 내 눈동자 속에 활자로 흐르는 별들의 반짝임을 갖는 것이 독서다.
시인이기 전에 한 개인으로 바라는 것이 있나?
언제나 나답게 사는 것, 그것이 나의 계획이고 소망이다. 여행을 더 자주 하고, 더 열심히 글 쓰는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일들보다 현재의 일에 더 집중하는 것.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시가 있다. ‘내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는가/ 내가 나를 소유하는 순간은/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인가/ 아니면 내쉬는 동안인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다음은 무엇을 쓸지/ 연필이 알고 있는 정도/또는 다음에 어디로 갈지/ 그 연필심이 짐작하는 정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저 | 더숲
51편의 산문이 태피스트리를 직조해 가며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궁극적인 물음에 답하는 이 책은 오랫동안 그의 신작을 기다려 온 독자들에게는 그가 20여 년 전에 발표했던 첫 산문집보다 더 첫 산문집인 것처럼 신선하다. 그의 글들이 언제나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다작하지 않는 작가이기에 그의 새 글을 읽는 마음이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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