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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망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청춘의 우울

『상처의 인문학』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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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30년간 내가 해야 될 일이 빤히 보이는 미래, 앞으로 30년간 내가 벌어들일 수입이 자연스레 계산되는 미래, 30년 후 나의 남은 생애를 지탱해줄 수단과 방법이 정해져버린 이 재미없는 미래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려는 진심은 무엇일까.

아무리 기다리고 노력해도 내 차례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아
전성태, 『태풍이 오는 계절』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 까닭은 계산이 가능해서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로 일컬어지는데, 실제로는 이성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스릴을 갈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회가 세분화되면서 인간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전문화되고 축소되었다. 컨베이어벨트를 움직이는 수만 가지 부품들 중 하나로 자신의 입장이 간단하게 정리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컨베이어벨트의 내일은 누구라도 예상 가능하다. 오늘과 똑같은 내일, 오늘과 똑같은 업무, 오늘과 똑같은 권태 속에서 변해가는 것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생을 향한 기대감. 살아온 날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나이가 들수록 삶에 대한 기대치는 반비례해서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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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공무원 시험이 있는 날이면 청년들의 대이동으로 나라가 들썩인다. 수십만 청년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적성과 재능을 포기하고 획일적인 수험공부를 통해 혈세에 길들여지는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행복할 테지만, 알다시피 다분한 속내는 대기업 입사보다는 수월하다는 편의성, 그보다 더한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정년까지 큰 무리 없이 근속할 수 있다는 안정적인 신분에 이끌려 노량진으로, 인터넷강의로, 도서실로 발길을 돌린다.

 

앞으로 30년간 내가 해야 될 일이 빤히 보이는 미래, 앞으로 30년간 내가 벌어들일 수입이 자연스레 계산되는 미래, 30년 후 나의 남은 생애를 지탱해줄 수단과 방법이 정해져버린 이 재미없는 미래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려는 진심은 무엇일까.

 

아무리 기다리고 노력해도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서 나를 미지의 신세계로 인도해줄 태풍이 불어오지 않으리라는 절망. 그럴 바에야 미풍이더라도 내 삶을 움직여줄 무엇인가를 붙잡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라는 지극히 계산적인 선택. 그리고 계산이 끝나버려 더 이상 기대할 것조차 없는 지루한 미래를 기다려야 한다는 힘없는 한숨.


인물 쪽으로 돌아가면 난 참 할말이 없어진다. 종암이는 눈이 안 좋아서 그렇지 깎은 밤톨마냥 허여멀쑥한 게 논두렁 볕을 쬐고 자란 여기 물색은 아닌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나는 무쇠솥 밑창 같은 얼굴에, 그 빛깔만큼이나 깊은 여드름 구멍도 숭숭 많다. 봉자년의 말에 따르면 너무 서둘러 배운 담배 탓이란다.
하긴, 나도 잘하는 게 요것말고도 또 있긴 하다. 용접봉도 댈 줄 알고, 담벼락쯤은 우습게 미장을 하고, 삼동네에 묻어낸 보일러는 여태 뒷말이 없다. 그것뿐이냐. 근래에는 석재 공장에서 돌도 자르고 갈았다. 허나 그게 무슨 대순가. 서른 살을 눈앞에 차려 놓고 이 촌구석에서 썩고 있는데.
-전성태, 『태풍이 오는 계절』 중에서

 

소설 『태풍이 오는 계절』은 현대사회에서 정답 없는 시험지에 비견되는 농촌에서 삶의 정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30대 동네 백수건달의 계산되지 않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는 무당이다. 신이 들려 주인공에겐 관심이 없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탈출하고자 가출과 비행을 일삼던 주인공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상경했다가 온갖 쓴맛을 본 후에 다시 지긋지긋한 고향으로 내려온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십 수 년이 흘렀건만 변한 게 없다. 고향집의 초가지붕도 그대로, 농사짓고는 세 끼 먹고 사는 것도 감당이 안 돼 날품을 팔거나 읍내 공장에서 막일이라도 해쳐내야 하는 답답한 현실도 그대로다. 변한 게 있기는 하다. 친구들이 죄다 고향을 등져 젊은 사람 찾기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와 같고 아버지들이 남겨준 밭고랑 사이에서는 눈알을 뒤집고 찾아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삶을 가늠해가며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안정된 생활을 소유해보고 싶어 기를 쓰지만 고정된 직장이나 수입이 없는 현실은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널빤지 같다. 노가다로 날품을 팔고, 보일러를 고치러 다니는 등 육체를 돈으로 환전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를 막론하고 달려들지만 사람들은 뚜렷한 직업이 없는 주인공을 ‘놀고먹는 노식이’로 부정해버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태풍 피해보상금이라도 한몫 챙겨 뭐라도 해볼 요량으로 태풍이 거세게 몰아친다는 예보 날짜에 맞춰 헌집을 때려 부쉈는데 온다던 태풍이 꼬리를 내리는 바람에 보상금은커녕 잔머리를 굴려 나랏돈을 빼먹으려 한 염치없는 젊은 놈 소리를 듣고야 만다.


일확천금을 노렸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삽질을 해봐야 입에 풀칠하기도 벅찼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얄궂다. 가방 끈 길고, 연줄이라도 되는 놈들은 나랏돈을 곶감 빼먹듯이 훔쳐 먹어도 일일 술술 풀리건만 주인공에겐 온다던 태풍마저도 신세를 더욱 처량하게 만드는 비바람이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낙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던 젊음의 몸부림이 자해(自害)로 비춰지는 계절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태풍이라도 불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이 답답한 현실을 날려주었으면 바라는 주인공의 악다구니는 그래서 남의 일 같지 않다. 노력한 수고에 비해 너무나도 값이 떨어지는 보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세태야말로 보이지 않는 태풍이다. 젊음의 생장을 뿌리부터 위협하는 날 선 폭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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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다 날려버렸으면. 차라리....

 

젊음을 위협하는 폭풍을 피하기 위해 기를 쓰고 안전한 처마 밑을 탐한다. 처마 밑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고, 처마 밑에서는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다. 햇볕과 바람에 타죽지 않으려고 그늘 밑에서 여린 잎새로 가냘프게 온몸을 떠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특별한 새로움 대신 세상이 만들어놓은 낙후된 세월에 머무른 채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지 못하는 청춘들은 갈 곳을 잃고 유랑하는 민들레 홀씨다.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붙잡아주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지만, 그들에게 공동체의 미래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봄바람 대신 황사라는 말이 자주 들리는 이때에 과연 청춘의 뿌리가 푸른 봄을 만끽하는 날이 다시금 찾아와줄까?

 



 

 

상처의 인문학김욱 저 | 다온북스
외면하고, 피하고 싶고, 상처받기 싫은 마음이 결국 상처에 얽매이게 만든다. 불편하고 아픈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이 족쇄 같은 상처에서 벗어나 두려움 없이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답게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상처의 인문학』은 여든일곱의 노(老)작가가 절망 속에서 헤맬 때, 묵묵히 곁을 지키며 아픔의 길을 함께 걸어온 작품과 그 작가들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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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욱

올해로 87세의 현역 번역가 겸 작가인 김욱 선생은 벼랑 끝으로 떠밀린 삶에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로 글을 쓰고 있다. 나이를 잊게 만드는 그의 글은 힘 있고 위트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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