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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에드만>,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이 영화를 보다 최승자 시집 『내 무덤, 푸르고』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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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니 에드만>은 스토리 중심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괴하고 독특한 요소가 있다. 결론에 다다랐을 때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방식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멋졌다. 보지 않고서야, 절대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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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니 에드만>의 한 장면

 

독일 영화니까 독일 스타일의 유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엉뚱한 일들, 몹시 황당하고 웃기는 작은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162분 동안 폭소를 몇 번 터뜨렸다. 그런데 뭐랄까. 유머는 아니었다. 고단한 마음의 그늘이 일렁이는 웃음이랄까, 삶의 무게가 실린 탄식 섞인 웃음이랄까. 나도 모르게 웃고 나선 어이휴, 라고 한숨도 이어 몰아쉬었으니까.

 

일 중독자,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무미하게 시간을 쪼개 쓰는 딸과 원초적인 장난과 농담으로 시간을 풀어 쓰는, 토니 에드만이란 가명도 만들어 쓰는 아버지. 뭔가 조합이 위태롭다. 이 아버지, 분명 귀엽다고 할 수도 있는데...... 최승자 시집 『내 무덤, 푸르고』에 나오는 그 아버지 같은데 말이다.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박씨보다 무섭고.
전씨보다 지긋지긋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움트는 새싹처럼 보일 수가.

 

내 장단에 맞춰
아장아장 춤을 추는,
귀여운 아버지,

 

오, 가여운 내 자식.
- 최승자 시, 「귀여운 아버지」 전문

 

노년의 음악교사, 아버지는 애완견이 죽자 뭔가 깨달은 듯 휴가를 내고 딸이 근무하는 도시,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를 무작정 찾는다. 유능한 경영 컨설턴트인 딸은 모든 생활이 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람, 그런 딸에게 ‘무섭고 지긋지긋한’ 아버지는 아니지만 ‘내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귀여운 아버지 같기도 하지만 문제는 엇박자. 지속적인 엇박자 행보다.

 

이 엇박자 행보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딸과 아버지는 끝내주는 노래를 함께한다. 아버지의 농담 때문에 난데없이 끌려간 작은 파티장에서 원하지 않은, 부르고 싶지 않아 아버지의 피아노 전주가 몇 번 지나고 나서야 시작된 딸의 노래. 휘트니 휴스턴의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Greatest love of all)>은 절창이었다. 무엇보다 직업적 독기 품으며 살고 있는 딸의 상황과 노랫말이 기막히게 어우러져 마치 이 영화 <토니 에드만> 주제가처럼 느껴질 정도.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에요” 암, 그렇고말고. 피아노 치는 아버지의 표정은 딱 이랬다.

 

딸에게 표현하는 사랑이 부자연스러웠던(아니 더 정확히는 도저히 가닿지 않는 사랑을) 아버지는 말하고 싶어한다. 인생의 중요한 가치, 행복과 웃음을. 그리고 표현되지 못한 그것을 위해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연출한다. 이상한 틀니, 가발, 방귀 쿠션 그리고 불가리아 털복숭이 ‘쿠케리’의 탈까지. 아버지의 연출은 결국 딸에게 전해진다. 인생은 금세 지나간다고. 자전거를 가르치던 순간, 버스 정류장에서 딸을 기다렸던 그 순간의 행복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되지 않는 것이라고.

 

서걱거리는 관계에서도 차갑던 딸의 가슴이 조금 데워진 것은 확실하다. 회사 팀의 화목을 목적으로 집에서 생일 파티를 준비하던 딸이 꽉 조이는 원피스와 굽 높은 구두를 신다가 불현듯 벗어 던지고 나체 파티로 전환해버릴 때 관객은 알아챘다. 아버지의 뜻이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섹스도 자연스럽게 못 하던 딸, 마약을 해야 파티를 즐길 수 있었던 딸이 이런 파격을 부릴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겉치레를 버리고 나체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털복숭이 탈을 쓴 채 생일 파티에 왔다가 곧바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쫓아가 끌어안는 딸의 외마디가 “아버지, 고마워요”였다. 할리우드 영화라면 이렇게 끝나는 게 정석. 독일 영화는 다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영화 <토니 에드만>은 스토리 중심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괴하고 독특한 요소가 있다. 결론에 다다랐을 때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방식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멋졌다. 보지 않고서야, 절대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

 

딸이 부른 노래를 패러디하자면 “영화를 감상하는 법을 잊게 만드는 것, 이것이 가장 위대한 영화랍니다”다. 요약해도 절대 다 설명되지 않는 영화 <토니 에드만>은, 여배우 산드라 휠러의 연기 때문에 더욱 직접 봐야만 한다. 일 중독자 딸 이네스는 존재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되어버렸다. 일만 하지 마요,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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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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