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택용의 책과 마주치다
500만 원과 500억 원
몇 명은 『이제, 삼성이 답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있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라 느끼며 절망하다가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건 79명X500만 원의 셈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79개의 우주가 사라졌다며 분노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방진복을 입고 저마다의 자세로 멈춰 서 있다. 몇 명은 『이제, 삼성이 답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있다. ‘또 하나의 약속’이란 영화로도 알려진 2007년 삼성반도체 고 황유미 씨의 백혈병 사망 사건. 그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반올림'이 삼성전자 반도체, LCD 노동자들의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기 위해 삼성홍보관 앞에서 1년 동안 농성하며 각계각층과 진행한 ‘이어 말하기’를 엮은 책이다.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 삼성이 치료비를 주겠다며 사직서를 받아가고 건넨 돈 500만 원. 삼성이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 씨 등과 관련해 건넨 돈 약 500억 원. 이 기막힌 대비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몰랐다고 했다. 몰랐다고 한 말은 사실일 것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 부회장님한테 그깟 500만 원의 향방이 중요할 리 없다. 삼성이 흔들리면 나라 경제가 흔들린다며 옹호하는 무리한테 반올림에 제보된 79명의 직업병 사망자는 그저 79명X500만 원일 뿐이다. 그들이 걱정하는 건 제대로 된 나라 경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라 느끼며 절망하다가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건 79명X500만 원의 셈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79개의 우주가 사라졌다며 분노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해 500일이 넘도록 끊임없이 이어 말하고 있다.
관련태그: 이제, 삼성이 답하라, 강남역 8번 출구, 삼성반도체, 반올림
대학에서 언어학을 배운 뒤 불성실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관뒀다. 사진이 가장 쉽겠거니 지레짐작하고 덤볐다가 여태껏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개인 사진집으로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1,895일 헌정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와 고공농성과 한뎃잠을 찍은 《외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