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택용의 책과 마주치다
아빠 잘 가. 헤어지고 나서도 가던 길 멈칫하며 자꾸 돌아본다. 인사를 나눈 사람이 누군지 이미 보이지도 않지만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살갑잖은 아들 둘만 둔 시골의 무뚝뚝한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일까. 대학 등록금에,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늦게 편입한 학교의 대출받은 학자금까지 아들도 모르게 갚아버린 촌스런 아버지는 서울에 와도 집에서 자고 가는 법이 없다.
「혜화역 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 이상국 시집 『뿔을 적시며』에 수록
뿔을 적시며이상국 저 | 창비
핍진한 현실인식을 견지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삶의 풍경을 전하는 시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따사로운 상상력과 정감 어린 묘사, 자연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정갈한 언어들이 삶의 깊고 오묘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관련태그: 월간 채널예스, 12월호, 이상국, 혜화역 4번 출구
대학에서 언어학을 배운 뒤 불성실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관뒀다. 사진이 가장 쉽겠거니 지레짐작하고 덤볐다가 여태껏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개인 사진집으로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1,895일 헌정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와 고공농성과 한뎃잠을 찍은 《외박》이 있다.
<이상국> 저9,000원(10% + 1%)
1976년 〈심상〉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상국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이후 7년만에 펴낸 신작 시집. 핍진한 현실인식을 견지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삶의 풍경을 전하는 시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따사로운 상상력과 정감 어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