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 “나는 무죄야”
영화 <자백>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백>을 봤으면 한다. 특히 국정원과 검찰에서 간첩 사건을 발표하면 무조건 ‘믿고 보는’ 분들이 봤으면 좋겠다. 그 분들께서 영화를 보며 한 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만약 저 사람들이 간첩이 아니라면 얼마나 억울할까. 만약 나라면 얼마나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일까.
정보기관에 일하는 A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간첩 혐의로 기소됐다 무죄 판결이 선고된 사람들이 화제에 올랐다. A는 그들이 간첩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안타깝습니다. 100% 간첩이 확실한 데 판사들이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
나는 A에게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수사를 계속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자백에만 의존하는 건 문제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답했다.
“일단 풀어준 뒤 몇 년씩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게 포착됐을 때 검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들어갈 예산과 인력을 생각해보세요.”
<뉴스타파> 최승호 PD가 감독을 맡은 영화 <자백>은 국가정보원의 간첩 조작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영화엔 2012년 탈북한 화교 출신 유우성과 2013년 탈북한 홍강철, 2011년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받던 중 자살한 한종수, 그리고 1974년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김승효가 등장한다.
영화는 무죄 판결이 확정된 두 사람(유씨, 홍씨)과 아직 유죄의 틀 속에 갇혀 있는 두 사람(한씨, 김씨)을 대비하면서 울림을 키워나간다. 특히 한씨와 김씨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국정원과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 조사 과정에서 한 인간의 삶이 허물어지는 과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처참하다.
최승호 PD의 취재 결과 한종수의 실제 이름은 ‘한준식’으로 나타난다. 생일도 경찰의 변사 기록에 기재된 ‘1976년 8월15일’이 아니었다. 생사람이 죽었고, 그 주검이 땅 밑에 묻혀 있는데 그의 삶은 미스테리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가 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한준식이 죽어서 슬프다면 김승효는 살아남아서 슬픈 경우다. 그는 간첩 혐의로 유죄가 선고된 뒤 7년 간 수감 생활을 한다. 이후 일본으로 보내져 20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현재 형 집에 살고 있다. 연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뭔가 말하려 하지만 언어의 옷을 입히지 못하는 입술은 그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추측하게 한다.
카메라 앞에서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함에 있어선 어눌하지만 단호하다. 일본어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중앙정보부가 (조서를) 멋대로 쓴 거야”라고 말하다 수십 년간 쓰지 않던 한국어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그것이 박정희의 정치야. 어떤 정치냐 하면 청와대 정치고 중정의 정치야. 어떤 것이라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야…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왜냐하면 무죄로 못 됐으니까. 죽고 싶단 말이야. 나는 무죄야.”
그 어떤 영화, 그 어떤 대사도 “나는 무죄야”라는 이 한마디만큼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 무죄인 자만이 할 수 있는 말, 유죄 판결에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자만이 할 수 있는 말, 그 어느 배우도 연기해내지 못할 말 아닌가.
김승효는 중앙정보부에서, 감옥에서, 일본의 정신병원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렇게 고문당하고 법정에 서야 했을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그렇게 쥐어짠 것일까. 그의 결론은 ‘나는 수단이었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정치를 위해 잡아 가두고, 학생운동을 억압하는 데 이용하고, 그 목적과 유통기한이 끝나면 쓰고 버리는 도구였을 뿐이다.
한종수, 아니 한준식의 죽음도 다르지 않다. 국정원은 “그는 자백을 하다가 자살했다”고 말한다. 물론 탈북 후 중국에 있던 한준식이 미국에 가려 했다는 친구들의 증언이나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 적이 없다는 딸과의 통화만으로 그가 간첩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국정원은 앞에 나와 설명을 해야 한다.
그를 죽인 건 “너는 유죄야”라는 국가권력의 유죄 추정이었다. 일단 유죄 추정의 그물 안에 들어가면 벗어나려 할수록 더 옥죄어온다. 나는 헌법 위반인 유죄 추정이 한국 땅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다. 한씨가 어떻게 조사받았고, 왜 죽었는지 경위를 밝히지 않은 채 그의 주검만 ‘무연고 변사체’로 땅에 파묻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국정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김기춘 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 “잘못했다”고 자백할 가능성은 0%다. 그들은 유우성, 홍강철, 한준식, 김승효가 간첩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유씨가 중국 국경을 넘어 북한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확인서를 위조했던 것도 ‘간첩이 분명한데 증거가 부족하니 자료를 보완하자’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간첩 사건 조작이 아니라 ‘간첩을 잡아넣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확신이 더 무서운 것이다. 앞으로도 똑같은 상황을 재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백>을 봤으면 한다. 특히 국정원과 검찰에서 간첩 사건을 발표하면 무조건 ‘믿고 보는’ 분들이 봤으면 좋겠다. 그 분들께서 영화를 보며 한 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만약 저 사람들이 간첩이 아니라면 얼마나 억울할까. 만약 나라면 얼마나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일까. 이 영화를 보려는 발길이 길게 이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유죄 추정이 무죄 추정으로 바뀌고,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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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