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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중년은 아니었다

우디 앨런의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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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영란법이 저마다의 ‘카페 소사이어티’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정상인 줄 알았던 삶의 방식이 비정상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고,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기회가 돼줄 것이다. 문제는 김영란법이 성공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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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부정청탁 금지법)이 시행에 들어간 2016년 9월 28일. 나는 50대 초반의 공무원과 점심 식사를 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더치페이’로 옮겨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중년 이상 남자들이에요. 20~30대는 더치페이가 일상화되고 있고, 여성들도 각자 내는 걸 편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나이든 남성들은 식사 대접 받는 것을 ‘성공의 증표’ 쯤으로 생각하죠. 이 자리까지 왔으니 그 정도 대접은 받아도 된다고. 문득 문득 ‘갑질’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 무서워져요.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우디 앨런의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는 나이 듦에 관한 영화다. 계절로 치면 봄에서 시작해 여름을 거쳐 가을에서 막을 내린다. 주인공은 뉴욕에서 성장한 청년 ‘바비(제시 아이젠버그)’. 그는 꿈을 찾아 할리우드로 향한다. 잘나가는 에이전시 대표인 외삼촌 필(스티브 카렐)이 그가 비빌 언덕이다. 바비는 외삼촌 필의 비서인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첫눈에 반한다. 바비에게 할리우드 곳곳을 구경시켜주며 사교계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는 보니. 그녀도 순수한 바비의 열정에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하지만 보니는 바비, 필과의 삼각관계 속에서 안락한 삶이 보장된 필을 택한다. 바비는 뉴욕으로 돌아와 뒷골목의 해결사인 형이 운영하는 클럽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지배인으로 일한다. 카페 소사이어티는 뉴욕 최고의 사교 클럽으로 성장하고, 바비는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필과 보니 부부가 클럽에 나타난다.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바비 앞에서 보니는 동행들과 할리우드 사교계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운다. 잠시 후 바비는 보니에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도 경멸하던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이 됐군요. 인맥 자랑하고 파티 자랑하고.”
“바비. 예전으로 돌아가서 얘기나 해요.”

 

보니도 변했지만 바비도 변했다. 순수했던 청년 바비가 아니다. 성공의 발판인 클럽은 살인 후 시신을 콘크리트로 암매장하며 벌어들인 형의 돈으로 일군 것이다. 클럽에서 주워들은 투자 정보와 정치인이 던져주는 수사 정보, 뒷거래, 가십으로 부를 키워간다. 그의 누나도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자 남편과 교양 있는 삶을 살면서도 이웃집 남자의 행패를 오빠에게 일러바쳐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땀 흘려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삶이 실은 누군가의 피눈물 위에 서 있다. “인생은 가학적인 작가가 쓴 코미디”라는 바비의 말에선 신산함이 느껴진다. “선택에는 배제가 따른다”는 대사는 결국 자신이 꿈꾸던 삶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카페 소사이어티>를 보는 내내 마음이 뒤숭숭했다. 젊은 날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에서 졸업할 무렵 기자의 꿈을 품게 된 이유는 간명했다. 사실을 신속 정확하게 알려 시민들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데아(idea)가 매력적이었다. 팩트를 돈이나 자리와 바꿔먹는 ‘사이비 기자’, 교묘한 논리로 권력을 뒷받침하는 ‘어용 언론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현실은 이데아에서 멀어져갔다. 선배 기자들을 따라 참석하는 식사 자리와 술자리가 밤하늘의 별만큼 무수해졌고, 가슴속 양심의 목소리보다 선배의 채근 한마디가 무서워졌다. 선배들로부터 칭찬 듣고 회사에서 상 받으면 그저 기분이 좋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과 밤낮 없는 기사 경쟁 속에서 그야말로 ‘무엇이 중헌지’를 잊곤 했다.

 

어쩌면 나도 작은 ‘카페 소사이어티’에 갇혀 살아왔는지 모른다. 기자 사회, 그것도 특정 언론사의 규범과 프레임에 따라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이 사회 전체에서 통용되는 규범과 프레임인 줄 착각했다. 내가 취재해온 법조계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말하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다. 법정 안의 정의와 법정 밖의 정의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했다. 

 

나는 김영란법이 저마다의 ‘카페 소사이어티’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정상인 줄 알았던 삶의 방식이 비정상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고,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기회가 돼줄 것이다. 문제는 김영란법이 성공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청년들의 눈엔 중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중년’인 것처럼 비칠 것이다. 지금 그들이 보는 모습이 전부이기에.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푸른 꿈을 좇고 싶던 시절, 무언가에 환멸을 느끼고 그 속에서 절박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날 때부터 중년은 아니었다. 

 

영화가 말하듯 “역시 이별 노래가 돈이 되는”게 인간사이고, “인생은 인생만의 계획”이 있고, “꿈은 꿈일 뿐”일 수도 있다. 그 반대쪽엔 “평생 지워지지 않는 감정들”이 있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삶이든. 그 지워지지 않는 감정들을 잊지 않으며 살아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바비는 올드랭사인을 들으며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나는 관객석에 앉아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왜 기자가 되려고 했는가. 무엇을 위해 쓰는가. 내가 경멸했던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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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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