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엔의 사랑>, ‘의문의 1패’를 넘어서라
쓰러져야 일어설 수 있다
영화가 젊음에게 내리는 지령은 이것일 것이다. 어떻게든 ‘의문의 1패’를 넘어서라.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싸움을 걸어라.
영화 <백엔의 사랑>의 주인공 이치코(안도 사쿠라)는 서른두 살 여자다. 대학 졸업 후 직업 없이 살아온 이치코의 허리엔 지나간 세월의 징표인 살이 붙어 있다. 그녀는 “여자이길 포기”했고 “엄마 도시락가게 보조”가 경력의 전부다. 한 번도 제대로 출루할 기회를 얻지 못한 주자다.
이치코는 이혼 후 어린 조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여동생과 매일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이다. 팔을 걷어붙이고 가게 일을 돕는 여동생 눈에 비디오게임만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이치코가 밉기만 하다. 어느 날, 싸움 끝에 여동생이 힐난을 퍼붓는다.
“부모님 연금 노리고 있지? 부모님 돌아가셔도 눈 하나 깜박 안 할 돼지가!”
이치코는 동생과의 난투극 끝에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이 매일 밤 주전부리를 하기 위해 찾던 100엔 샵에서 심야 알바를 시작한다. 샵의 이름은 ‘백엔생활(百円生活)’. 백엔생활은 무대 밖으로 밀려난 인생들이 손님과 알바로 서로를 대면하는 곳이다. 점장은 우울증에 걸려 잠깐씩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동료인 40대 돌싱남은 “외로운 사람끼리 사귀자”고 치근댄다. 그 와중에도 그녀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남자가 있었으니 매일 바나나를 사가는 37세 퇴물 복서 ‘바나나맨’ 카노(아라이 히로후미). 그는 이치코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왜 나 같은 사람한테…”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녀는 화내지 않는다.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심하게 거절당해본 기억이 있거나, 거절당할까봐 마음을 졸여본 사람은 이해한다. 거절당하는 그 마음을. 그녀는 외려 이 남자가 자기를 외면하지 않을까 불안하다.
카노가 준 티켓으로 이치코는 생전 처음 권투 경기를 보게 된다. 카노는 연타를 맞고 링에 눕는다. 그때 그녀 눈에 비친 건 신기하게도 경기가 끝난 뒤 카노와 상대 선수가 서로 포옹하고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이다. 어떻게 피 터지게 싸우고도 서로를 격려할 수 있을까.
그녀는 ‘눈팅’만 하던 체육관에 들어가 복싱을 시작한다. 카노가 곁을 떠난 뒤에도, ‘백엔생활’ 알바를 그만둔 뒤에도 그녀의 복싱 훈련은 계속된다. 과체중이던 몸이 날렵해지고, 흐릿해 보이던 눈매가 매서워지고, 슬리퍼를 질질 끌던 발걸음은 눈부신 풋워크로 변해간다. 그녀는 묵묵히, 오로지 복싱에만 집중한다. 오랜만에 만난 카노가 “열심히 사는 인간 보는 거 질색이야”라고 말해도 그녀는 꿈쩍 않고 복싱에 몰입한다.
그러나 현실은 비정하다. 데뷔전에 나간 이치코는 사정없이 난타 당한다. 링 위에 누운 그녀를 향해 가족들은 외친다. “일어나.” “일어나.” 여동생은 외친다. “일어나서 죽어!” 10분간 처절하게 전개되는 복싱경기 장면은 쓰러질 땐 확실하게 쓰러지라고 말하고 있다.
쓰러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사람은 어지간해서 변하지 않는다. 판정패는 패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운이 없어서, 심판이 공정하지 않아서. 자꾸 변명을 하려 든다. 그래서 어설프게 쓰러지면 일어서지 못한다. 확실하게 쓰러져야 일어설 수 있다. 쓰러진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지가 보인다. 사람이 변하는 건 큰 병을 앓았거나 내면이 깨어지는 좌절을 경험했을 때다.
경기가 끝난 뒤 상대 선수의 어깨를 두드리고 링을 내려오는 이치코의 얼굴은 멍투성이다. 그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경기장을 나왔을 때 카노가 기다리고 있다. 이치코는 카노 앞에 서서 아이처럼 엉엉 운다.
“이기고 싶었는데… 한 번이라도 좋으니, 딱 한 번이라도 이겨보고 싶었다고.”
카노가 답한다.
“하긴 최고로 좋지. 승리의 맛은.”
누구나 안다. 승리의 맛이 좋다는 건. 하지만 이 시대의 젊음에겐 승리를 맛볼 기회, 싸움의 기회조차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 싸울 기회를 얻지 못한 젊은이들은 마음속에서 늘 ‘의문의 1패’만 당한다. 피기도 전에 지고 있는 청춘들, 절박한 얼굴을 냉소로 가리고 있는 청춘들에게 싸울 기회는 요원하다.
영화가 젊음에게 내리는 지령(指令)은 이것일 것이다. 어떻게든 ‘의문의 1패’를 넘어서라.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싸움을 걸어라. 그 싸움의 끝에 패배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싸움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노는 이치코에게 말한다.
“밥 먹으러 갈까?”
이제 그녀는 어제의 그녀가 아니다. 확실한 1패를 기록했으므로 이제 승수를 늘리든, 패수를 늘리든 그녀는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여기, 빈속을 따뜻하게 채워줄 밥 한 그릇이 세상으로 나갈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