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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에 뉴튼, 유재석에게 ‘지존을 찾아서’가 있었듯
소소한 실패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유재석 식 오합지졸물 (3)
실패가 굳이 권장할 만한 체험은 아니지만, 실패를 죄악시하고 뒤돌아보지 않으려는 습관이 도움이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낫게 실패하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소소한 실패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유재석 식 오합지졸물 (2)”에서 이어집니다)
다시 애플이다. 실패했던 아이템을 반복해 엄청난 성공으로 되살린 사례를 이야기할 때 애플을 빼먹으면 서운할 것이다. 애플의 연혁에서 종종 의도적으로 무시되곤 하는 제품 중 가장 의미심장한 제품은 1993년 개발된 PDA ‘뉴튼’ 메시지 패드다. 모든 PDA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간 시도였던 탓에 뉴튼의 판매량은 차마 어디 가서 자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 탓에 스티브 잡스의 애플 복귀 직후 단종된 이래 지금까지 애플의 공식 석상에서 제대로 된 언급을 받아본 적도 없는 제품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개발인력은 거의 고스란히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개발팀으로 흡수되어 애플의 새 미래를 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이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선보인다는 식의 제품소개를 선호했던 잡스의 성향 탓에 언급이 덜 되었을 뿐, 뉴튼이 확립한 개념 - 액정 스크린에 직접 글과 그림을 입력할 수 있고 지식을 탐색할 수 있는 포터블 디바이스 - 은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고스란히 이식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실패한 개념이라 해서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성공할 수 있는 시간과 조건을 노려 새롭게 시도해 성공을 거둔 사례다.
비록 상업직 실패로 끝난 제품이었지만, 애플은 뉴튼의 경험을 살려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계승한다.
Newton MessagePad 100 ⓒApple Inc. 1993 / iPhone ⓒApple Inc. 2007
뉴튼이 없었다면 아이폰이 없었을 것이고
‘방바닥 콘서트’가 없었다면 <슈가맨>도 없었을 것이다
유재석에게도 뉴튼과 같은 아이템이 제법 있다. 앞서 이야기한 ‘유재석식 오합지졸물’을 제외하고도 그 개수가 상당하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경험이 많다는 건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만큼 많은 실패를 했다는 걸 의미한다. 누군가는 “에이, 무명시절 길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인데.”라고 이야기하겠지만, 그가 MBC <무한도전>을 안정궤도에 올리는데 성공한 2006년 이후에도 유재석은 꾸준히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2007년 SBS <일요일이 좋다> ‘뉴 엑스맨’이 끝나고 2008년 ‘패밀리가 떴다’를 성공시키기 직전까지 1년 2개월 가량, 유재석은 <일요일이 좋다>에서만 3개의 프로그램에 참여해 MC의 자리를 지키고 3번의 실패를 맛봐야 했다. 박명수, 신정환, 하하와 함께한 ‘하자Go’는 꾸준히 “이게 ‘엑스맨’과 뭐가 다른가”라는 비판에 시달리다가 두 달을 채 못 채우고 종영이 됐고, TV의 모든 프로그램이 생방송이던 시절을 예능에 접목해 재현해 보겠다던 나름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했던 ‘옛날TV’ 또한 5개월만에 종영이 됐다. ‘기적의 승부사’는 방송 3개월 만에 극약처방을 한다며 코너명을 ‘기승史’로 바꿨지만 7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 오랜 실패를 반복하고도 다시 기회를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위치에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지만, 적어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손대는 프로그램마다 성공을 거두는 마이더스의 손은 아니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 하다.
이를테면 유재석이 무명 시절 KBS 정통 코미디 무대에서 ‘남편은 베짱이’ 코너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가 기껏 MBC <목표달성 토요일> ‘스타서바이벌 동거동락’과 KBS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MC 대격돌 공포의 쿵쿵따’로 인기를 얻은 이후에 자신이 성공하지 못했던 지점인 정통 코미디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SBS <코미디타운>을 시도했던 건 많은 이들이 잊고 있는 사실이다. 버라이어티 MC로서의 자질은 인정받았으나 자신의 본류인 정통 코미디에서 거푸 실패를 경험한 유재석은,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무한도전> 내에서 끊임없이 꽁트 코미디를 선보였다. 물론 과거 <코미디타운>을 같이 했던 정준하나, 자신과 비슷한 시기 MBC 정통 코미디의 명맥을 잇고 있던 박명수, KBS <개그콘서트> 출신의 정형돈이 있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유재석 본인이 꾸준히 정통 코미디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무한도전> 내 꽁트 시리즈 ‘무한상사’가 자리잡는 일은 요원했을 것이다.
유재석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다가 “어,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기시감에 사로잡히는 건 흔한 일이다. <무한도전> ‘무한도전TV’ 특집(2009)은 멤버들이 어설프게 TV 프로그램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어딘가 앞서 언급한 <일요일이 좋다> ‘옛날 TV’(2007)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고, JTBC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2015~2016)은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2014)의 흔적만큼이나 팬과 가수의 만남을 매개로 한 음악 토크쇼를 표방했던 MBC <놀러와> ‘방바닥 콘서트 - 보고 싶다’(2012)의 흔적이 짙은 시도였다. 비록 프로그램 자체는 실패로 기록됐지만, KBS에서 ‘남자 토크 쇼’를 표방하며 선보인 <나는 남자다>(2014)가 방영 당시 나름의 반응을 얻었음에도 끝내 폐지되고 말았던 MBC <놀러와> ‘트루맨쇼’(2012)의 확장판이었다는 건 많은 이들이 지적했던 바다. 이쯤 되면 ‘마이더스의 손’이라기보단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탓에 매번 성공으로 기록된다는 ‘인디언 기우제’에 가까운 행보다. 많은 이들이 유재석이 최근 시도했다가 큰 수확을 거두지 못했던 일련의 프로그램들 - <나는 남자다>, SBS <동상이몽 - 괜찮아 괜찮아>(2015~2016) - 의 실패를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실패했던 아이템을 소맷자락에서 다시 꺼내어 성공을 일구는 모습을 자주 봤기 때문이다.
(좌) SBS <일요일이 좋다> ‘옛날TV’. 여기에서 선보인 ‘멤버들이 어설프게 재현한 TV프로그램’이란 콘셉트는
훗날 MBC <무한도전> ‘무한도전TV’ 특집(우)에서 다시 시도된다.
<일요일이 좋다> ‘옛날TV’ ⓒSBS. 2007 / <무한도전> ⓒMBC. 2006~
실패가 굳이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흔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는 조언을 비웃곤 한다. 실패한 이후 다시 일어서는 게 극도로 힘든 한국과 같은 불신사회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조언이 얼마나 쉽고 공허한 말인지 알기 때문이다. 막말로 나의 실패를 저 사람이 책임져 줄 것도 아니지 않나.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실패가 굳이 권장할 만한 체험은 아니지만, 실패를 죄악시하고 뒤돌아보지 않으려는 습관이 도움이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 어떤 거대한 성공도 실패와 시행착오 없이 한 번에 성취되지 않고, 실패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으면 다시 도전해 볼 기회도 더 낫게 시도해 볼 기회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실패’와 조금은 더 친해지는 태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지 모른다. 유재석에겐 ‘옛날TV’와 ‘지존을 찾아서’가 있었고, 애플에겐 ‘뉴튼’이 있었다. 당신의 ‘뉴튼’과 ‘지존을 찾아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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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