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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낫게 실패하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소한 실패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유재석 식 오합지졸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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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개인이든 비영리단체든 기업이든, 프로젝트의 실패는 시간과 노동과 돈의 성과 없는 지출을 의미한다.

(“부족하고 모자란 이들의 자기 증명 - 소소한 실패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유재석 식 오합지졸물 (1)”에서 이어집니다)

 

실패를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개인이든 비영리단체든 기업이든, 프로젝트의 실패는 시간과 노동과 돈의 성과 없는 지출을 의미한다. 그 실패가 가져다 준 정서적 충격에서 벗어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그 쓰디쓴 결과에 이르기까지 누가 어떤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으며 어떤 지점에서 주어진 환경에 잘못 대처했는지 되돌아 보는 것은 기껏 벗어난 정서적 충격 안으로 다시 다이빙하는 짓이나 다름 없으니까. 언뜻 체감이 안 된다면, 지금 휴대폰의 녹음기 어플을 꺼내어 자신이 말하는 것을 녹음해서 다시 들어보자. 내 귀로 들었을 때엔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의 단점, 우스꽝스러운 발음과 군더더기 투성이의 말버릇 같은 것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별 다른 실수나 실패가 없는 일상의 회화조차 녹음을 거쳐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 들어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데 하물며 처절한 실패 이후 그 과정을 다시 복기하는 일은 어떻겠는가.

 

 

실패를 복기하는 일의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윤태호 작가의 『미생』 시즌 1에서 가장 숨막히는 대목이 고작해야 계약직 신입사원인 장그래가 요르단 중고차 사업을 다시 해보자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기업 차원에서 집행되는 과정인 것 또한 그런 이유다. 밖에서 바라봤을 때는 실패의 이유와 그 결과, 개선방안을 객관적으로 계산할 수 있지만, 실패를 한 당사자 입장에서 그것을 냉정하게 살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묻어두고 다른 방향으로 어서 도망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당연한 심리다. 그런 것을 고작해야 기업 내부 먹이사슬의 최말단에 있는 계약직 신입사원이 다시 후벼 파는 광경이란, 말이 쉽지 견디는 게 쉽겠는가. 스스로 개척자의 나라라 자부하며 오랜 세월 실패에 대해 연구해 온 미국과 달리, 전후 압축성장을 경험하며 세계에서 유례 없는 성장 속도를 기록한 일본과 한국이 실패에 대한 연구를 기껏해야 각각 지난 세기 말, 이번 세기 초에 시작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속 성장이 미덕인 곳에선 실패가 죄악시되는 법이니.

 

그런 의미에서 유재석이 같은 포맷을 수 차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반복해서 시도했다는 점은 한국에선 드문 일이고 그만큼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굳이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 말고도 충분히 다른 옵션들이 있었음에도 꾸준히 재시도를 했다는 점은 이례적인 사례이기도 하지만, 그가 단순히 ‘똑같은’ 포맷을 될 때까지 반복해서 시도한 것이 아니라 앞선 실패에서 조금씩 보완을 거쳐가며 거푸 다시 시도를 해왔다는 점, 다시 말해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을 반복해 왔다는 점에서도 ‘유재석식 오합지졸물’이 자리를 잡은 과정은 천천히 음미할 만 하다. KBS <남희석 이휘재의 한국이 보인다> ‘지존을 찾아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2000)에서 처음 선보인 ‘오합지졸에 어딘가 빈 틈이 많은 연예인들이 떼로 모여 무언가에 도전한다’라는 포맷은 그 뒤에 나온 작품들에서도 고스란히 유지됐지만, 그 골격을 채우는 디테일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잘한 변화들이 꾸준히 시도되었다.

 

 

앞선 실패에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분석해야
다음 도전으로 승계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지존’에게 도전한다는 콘셉트 자체는 ‘지존을 찾아서’에서 KBS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천하제일 외인구단’(2003)으로 이어지는 과정까지는 살아남았다. 코너 오프닝 영상에서 큼지막하게 날아오던 ‘至尊’이란 글씨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콘셉트를 유지하면서도 ‘천하제일 외인구단’에선 멤버들이 지존에게 도전하기 위해 대비훈련을 한다는 콘셉트가 대폭 강화됐다. 단순히 지존과 오합지졸 멤버 사이의 현저한 실력차에서 오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만이 웃긴 것이 아니라, 그걸 이겨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과정의 재미 또한 쏠쏠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대결 자체에서는 쉽게 도드라지기 어려운 개별 멤버들의 캐릭터를 충분히 탐구할 시간을 가진다는 점에서 훈련시간에 많은 분량을 안배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육각모를 쓴 훈련 교관들이 등장해 멤버들을 뻘 밭에 굴리고 오리걸음을 시키는 과정은 훗날 MBC <목표달성 토요일> ‘무모한 도전’(2005)에까지 그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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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뭘 이렇게까지 훈련을 하나 싶은 순간,
이 찌질함 속 캐릭터 구축이 이후의 유재석식 오합지졸물의 요체가 되었다.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천하제일 외인구단’ ⓒKBS. 2003

 

나름의 성과를 거둔 유재석은 ‘천하제일 외인구단’의 종영 이후에도 같은 도전을 해볼 기회를 얻는다. 비록 종영했으나 가능성을 거두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건 상대적으로 쉬워지니까. 그렇게 다시 잡은 기회인 SBS <일요일이 좋다> ‘유재석과 감개무량’(2004)에서 유재석은 ‘지존인 누군가’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개념을 시도한다. 비록 훈련과 연습과정이란 개념 없이 끊임없이 도전만 하느라 앞서 구축해 둔 ‘천하제일 외인구단’에서의 강점을 살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비교 관찰할 수 있다. 첫째, ‘지존인 누군가’에게 도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으로 범위를 넓히는 순간 다룰 수 있는 아이템은 많아지고 뽑아낼 수 있는 그림도 더 다양해진다는 것. 둘째, 훈련과 연습과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캐릭터 구축과 몰입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 아마 그러한 변화를 체감한 것이 단순히 시청자인 우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재석은 이러한 변화를 ‘무모한 도전’에서 이어가는데, 멤버들이 열심히 훈련을 해서 지존이 아닌 동전 개수기나 황소, 모기향 따위와 대결한다는 콘셉트는 앞선 실패들에서 비교 분석한 개별적인 장점들을 모두 모은 결과다.

 

‘이런 훈련이 과연 미션 성공에 도움이 되긴 하는 걸까’를 자문하며 생고생을 해가며 훈련을 해서 도전하는 게 기껏 모기향과의 모기잡기 대결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부조리와 찌질함의 극치라니. 한 분야의 지존과 대결한다는 근사한 변명거리도 없고, 인간적 존엄 따윈 앞의 훈련 과정에서 이미 다 소진했으니 대결이 끝나면 한 톨 남김 없이 완전연소하고 마는 ‘무모한 도전’은 오합지졸의 끝이었다. ‘무모한 도전’이 그나마 단순 폐지가 아니라 <무한도전>으로 이어질 때까지 1년 가량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몇 년 사이 유재석의 대중적 인지도가 상승했던 탓도 있겠으나, 이렇듯 앞의 실패들에서 걸러낸 성공비결들을 모아 정수만을 남겨 매니아들의 컬트적인 인기를 확보한 덕도 크다. 그리고 이 콘셉트는 아예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요소를 떼어버리고 멤버들의 캐릭터와 찌질함만을 극대화한 ‘퀴즈의 달인’으로 승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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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사람과 경기하는 게 아닙니다” 지존과 대결하는 콘셉트를 내려놓자
그림은 더 다양해지고 멤버들의 오합지졸성은 더 강조될 수 있었다.
<강력추천 토요일> ‘무모한 도전’ ⓒMBC. 2005

 

 

실패를 되돌아보는 괴로움을 참아내야
정신에 근육이 붙는다

 

유재석이 이렇게 유독 실패를 되돌아보고 분석하는 데 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본인이 ‘오합지졸물’에 대한 애착이 컸던 탓도 있지만, 아마 본인이 오랜 시절 무명을 거쳐오면서 자괴감을 극복하고, 성공한 다른 동료들의 방송 습관과 자신의 방송 습관을 비교 분석하며 올라온 사람이란 점이 컸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유재석의 진행 스타일은 먼저 성공한 많은 동료들의 스타일들을 조금씩 닮았다. 게스트에게 공간을 최대한 열어주며 경청하고 빠르게 캐릭터를 잡아주는 스타일은 송은이의 진행 스타일에서, 사소한 요소를 잡아 상대를 빠르게 몰아가면서 상황을 이끌어내는 것은 강호동의 진행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 개인의 실패를 분석하는 괴로움을 참아내고 성공한 선발주자의 장점을 벤치마킹하는 것을 반복한 사람에겐, 실패를 단순한 실패로 두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배울 것을 찾아내는 것을 감내할 만한 정신의 근육이 생긴다. 이러한 특징은 ‘오합지졸물’ 뿐 아니라 유재석의 다른 프로그램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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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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