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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언제나 ‘흰’ 것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한강 신작 『흰』낭독회 이야기 안에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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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6일 목요일, 마포아트센터에서 한강 작가의 신작 『흰』 낭독회가 열렸다. 많은 취재진과 독자들로 꽉 채워진 행사장은 한강 작가를 향한 관심과 열기를 실감케 했다. 한강 작가는 특유의 낮고 차분한 어조로 담담하게 책을 낭독했다. 독자들은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한 채, 그녀와 같은 호흡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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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소설집으로 돌아온 한강

 

2016년 5월 17일, 대한민국을 떠들썩 하게 한 뉴스가 있었다. 소설가 한강이 소설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 상을 수상했다는 뉴스였다. 오르한 파묵, 옌렌커 등 쟁쟁한 후보자들을 제치고 아시아 최초로 상을 받은 쾌거였다. 곧, 한국 문학의 위상을 높여준 이 엄청난 작가에게 많은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뉴스화 됐고, 그녀의 작품들 또한 무섭게 팔려나갔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관심과 환대 속에서도, 한강은 중심을 잃지 않았다. 신작 『흰』을 발표하면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글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흰』은 한강 특유의 그늘진 정서와 건조한 분위기가 잘 녹아있는 작품이다. 2014년에 완성한 초고를 다듬고 다듬어 65편의 이야기로 엮어낸, 소설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한 독특한 작품이다. 『흰』에는 결코 더럽혀 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 가 없는 ‘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날의 낭독회는 문학평론가 권희철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낭독회라는 행사목적에 걸맞게, 2시간여의 시간은 대화가 아닌 한강의 낭독으로 꽉 채워졌다. 덕분에 독자들은 한강의 목소리로 새로운 『흰』을 만나볼 수 있었다. 본격적인 낭독회의 시작 전, 한강은 그 동안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강 : 모두가 바쁠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꼭꼭 숨어있어서 그렇게 바쁘진 않았고요. (웃음) 강풍에서 잘 살아 남은 거 같아요. 몇 개의 행사가 더 잡혀있긴 하지만, 곧 제 방에서 다시 무언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도 오늘 이렇게 만나 뵈니까 정말 좋네요. 뭔가 제 편이 많이 오신 거 같아 편하고 마음이 놓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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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이 많은 ‘흰’ 것들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중략)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20쪽, 배내옷 中
 

한강은 배내옷이라는 소제목이 달린 부분을 가장 먼저 읽었다. 사실 『흰』은 한강의 자전적 이야기가 어느 정도 담겨 있는 소설이다. 한강이 얼굴도 본 적 없는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느낀,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 혼(魂)에 대한 상념이 ‘흰’ 이미지들과 함께 표출된다. 한강은 이 독특한 소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한강 : 제가 2014년 5월에 『소년이 온다』를 썼는데요, 2013년 가을에 제 소설을 폴란드어로 번역한 번역자의 제안으로 바르샤바에 머물게 됐어요. 2014년 8월말에 가서 12월까지 4개월 정도 머물렀어요. 사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 넋들이 저에게 아주 가까이 와 있다고 느꼈고, 혼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흰 것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고요. 그런 넋과 흰 것에 대해 생각할 때, 바르샤바를 가게 된 거에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던 도시가 복원된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 도시를 닮은 사람을 상상하게 됐고 그런 이미지가 확장되어서 책을 쓰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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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철 : 우리와 같은 현실적인 육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희미하게 존재하거나,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존재들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에 대한 작업을 계속해나가셨던 거 같아요. 선생님의 시선, 생각, 상상 속에서 다시 재건하는 작업들이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런 것이 흰 도시라는 챕터에서도 암시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책에서도 흰 사물들, 흰 속성을 계속 끄집어 내고 계시잖아요. 왜 흰 것에 대해서 쓰고 싶으셨나요? 흰 것이 한강작가에게는 어떤 것이었나요?

 

한강 : 돌아보면 제가 흰 것에 대해 많이 썼던 거 같아요. 희다는 게 이제 더럽혀지는 색깔이잖아요? 그런데 또 더럽혀 지지 않는 색깔이기도 하고... 특히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나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저는 소년이 온다』를 참혹과 어둠에서 밝음과 존엄으로 가는 이야기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흰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소설에서 어린 동구가 엄마의 손을 잡고 기왕이면 해가 비치는 쪽으로 가자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그 대목에서 이 소설이 출발했다고 할 수 있어요. 정리하자면 『흰』 이라는 책은, 저의 내면으로 좀 더 깊게 들어간 책이에요. 밝지만 그 안에 삶과 죽음이 다 들어있는 그런 흰 것에 대해서 썼다고 할 수 있죠.

 

권희철 : 책에 나오는 흰 것의 목록 중에 눈도 들어가는데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적대적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한강작가에게 흰 것이 굉장히 복잡한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 이런 표현을 쓰신 건가요?

 

한강 : 그건 제가 직접 겪었던 거예요. 눈보라가 아주 많이 치는 날에, 우산을 써도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세게 오는 눈이 아주 차갑고 적대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게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때론 차갑고 적대적이기도 하고, 연약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놀라운 건 그렇게 차갑고 적대적이라고 느꼈던 그 한 순간 저는 그 아름다움에 압도 되었거든요. 그것이 우리의 삶이고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희철 :  선생님 소설에 보면 미술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미술에서 흰색은 다른 모든 색들과 다르다고 들었어요. 하얀 캔버스가 있어야 그 위에 이런저런 색을 칠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흰색에는 온갖 색이 다 들어 있는 것이죠. 한강 작가의 책에서도 그런 근본적인 흰 색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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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72쪽, 입김 中-

 

사회자는 한강에게 독특한 형태의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묻자, 한강은 어려운 질문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차분하게 대답을 해 나갔다. 

 

한강 : 저에게는 삶을 껴안는 게 언제나 숙제 같은 일이에요. 채식주의자도 삶을 껴 안는 걸 어려워하는 자매의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토록 인간인 게 싫고, 그토록 삶을 껴안는 게 힘든 자매의 이야기. 다른 작품들 역시 삶을 껴안고자 하는 몸부림 같은 걸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구요. 우리가 정말 살 수 있다면, 살아가야만 한다면 결국은 다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연결되는 거죠. 『흰』 도 그런 맥락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는 언제나 눈부시게 밝은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렇게 안 돼요. (웃음) 이번에는 저도 아주 눈부신 『흰』 을 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삶과 죽음의 이야기, 그토록 껴안기 힘든 삶에 대한 기록을 쓰게 된 거 같아요. 소설의 한 부분에서 “더럽혀지더라도 너에게는 흰 것을 주고 싶다”고 얘기하는 게 있는데, 그건 소설 속 그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이제는 더 이상 삶을 껴안기 위해 억지로 애쓰지 않고, 흰 것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저 자신에게도 흰 것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소설을 썼던 거 같아요.

 

권희철 :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흰 빛, 흰 것은 언니뿐만이 아니라 수 많은 어떤 연약한 것들에게 전달되는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구성이 나와 그녀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흰 것과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아닐까라는 상상을 했어요.

 

한강 : 어떤 이야기이든 깊게 들어가면 우리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글을 쓰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언어로서 무엇을 하는 게 불가능 할 거 같아요. 제가 책 속의 아기에게 감히 줄 수 있다고, 주고 싶다고 생각한 그 흰 순간들을 곰곰이 들여다보게 되면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이 흰 것들을 그녀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고 저 자신에게도, 다른 모두에게도 주고 싶었던 것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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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는 『흰』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소년이 온다』 를 많이 언급했다. 『소년의 온다』에서 받은 영감, 두 작품 사이의 연결성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한강 : 이 책에 등장하는 “죽지마라.”는 문장은 『소년이 온다』 에서도 등장해요. 어떻게 보면 여러가지 면에서 『소년이 온다』 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흰 나비에 대한 이야기도 연결되어 있어요. 『흰』 에 보면 흰 나비의 움직임이 혼을 닮았다고 이야기 하잖아요. 『소년의 온다』 2장에서 정대의 움직이나 혼들의 움직임이, 투명한 나비들 같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나비의 이미지로 혼들을 상상했어요.

 

낭독을 마치고 독자들과의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한강 작가는 독자들이 작성한 “당신에게 흰 이란?” 질문지의 답변을 읽어나갔다. 한강은 개성 있고 문학적인 답변들을 읽으며 독자들과 함께 소통했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소감을 들으며 2시간여의 낭독회는 끝을 맺었다.

 

한강 : 단 한 번의 낭독회라고 붙어 있는데 정말 그래요. (웃음) 그 한 번의 만남에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좋았어요. 처음에 느꼈던 것 처럼 뭔가 다 우리편인 거 같아요. (웃음) 마음이 참 편안해요. 책 만드느라 애써 주신 많은 분들한테, 오늘 사회를 맡아주신 권희철 평론가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여기 와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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