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중혁의 대화 완전정복
농담을 했는데 누군가 웃지 않는다면
『모던 씨크 명랑』, 『1984』,『옛날 책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
농담을 자주 구사하는 나 역시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누군가 웃지 않는다면, 문제는 내게 있는 것이다. 웃지 않는 사람을 탓해서는 안 된다.
열여덟 번째 문제
<문제>
다음은 모바일 결제 시스템의 광고 내용입니다. 빈칸에 어울리는 말을 골라보세요.
임원: (전화를 걸고 있다) 응, 딸, 케이팝 콘서트? 매진 임박? 아빠가 그걸 예매를 할 줄 아나.
직원 A: (휴대전화를 꺼내고) 찬스다, 결제 빨리…, 카드 번호, 비밀 번호, CVC….
오 과장: 사람 참 복잡하긴…, 3초면 결제 끝. (결제 끝낸 후) 저한테 티켓이 있습니다.
임원: 그럼 자네는?
오 과장: 전 야근입니다.
임원: 역시 오 과장.
(시간이 흐른 후)
임원: 딸한테 점수 좀 땄어, 오 과장. ( ).
1) 내 딸 한번 만나보겠나?
2) 이제 오 차장인가?
3) 예매한 자리가 기둥 뒤편이라서, 딸이 참 좋아해. 벽을 좋아하거든.
4) 어제 마이너스 100점 추가해서 이제 마이너스 2천 점이야.
5) 고맙네.
<해설>
한동안 TV를 보지 않고 살다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들은 모바일로 구매해서 보았다) 광고가 보고 싶어서 TV을 다시 보고 있다. 광고가 끝나고 본 프로그램이 시작하면, 채널을 돌려서 다른 광고를 찾아 다닐 정도다. 광고 금단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저놈의 광고 때문에 지겨워서 못살겠네’ 싶다가도 보지 않으면 보고 싶을 때가 많다.
‘무조건 우리의 물건을 팔아먹고 말겠다’는 무자비한 광고도 좋아하고, 에둘러 말하고 조심스럽게 부추기는 낯 가리는 광고도 좋아한다. 요즘 어떤 모델이 가장 ‘핫’한지, 어떤 말투가 유행하고 있는지도 광고를 보면 알 수 있다. 광고는 당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타임 캡슐 같은 것이다.
김명환 씨가 펴낸 『모던 씨크 명랑 - 근대 광고로 읽는 조선인의 꿈과 욕망』을 보면 광고 속에서 끊임없이 유혹당하고 있는 우리들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신문광고 190여 개 속에는 나라 잃은 암울함은 온데간데없고, 서양 문명의 경이로움만 가득하다. 콘돔, 섹스 이론서, 여배우 모집, 탈모 치료제, 아들 낳는 약 등 지금보다 더욱 솔직한 욕망의 분출이 광고 속에서 이뤄졌던 모양이다. 내가 무릎을 치면서 본 광고는 이순신 CM 송이었다. ‘거북선 표 고무신’의 광고 음악인데 내용이 이렇다.
옛날에 옛날에 임진의 날리에
리슌신 장군이 지으신 거북선
거룩한 거룩한 장군의 거북선
조선의 큰 자랑 세계의 첫 발명
고무신과 이순신이 무슨 상관인가 싶었는데 2절까지 보고 나니 알겠다.
삼백 년 긴 세월 지내인 오날에
그 배의 후신이 고무신 되엿나
이 신을 신고서 행진고 울니니
나도 이순신이 너도 이순신이
처음에 그 배는 넓다란 바다를
륙디와 가치도 다니고 잇더니
지금에 이 신는 륙지와 바다에
어느 곳 물론코 잘 도라다니네
이순신 고무신이라니, 이런 라임을 보았나. ‘지코’와 ‘팔로 알토’도 울고 갈 가사다. 이순신 고무신 라임에 감화 받은 훗날의 래퍼들은 <거북선>이라는 노래에서 이렇게 라임을 맞췄다. “우린 거북선 다른 배들 통통/ 그냥 통통 떨어져라 똥통/ 커지는 네 동공 느껴지는 고통/ 우린 독종 너흰 그냥 보통.” 고무신과 이순신을 연결시킬 수밖에 없었던 불순한 의도를 생각하면 감흥이 떨어지긴 하지만 (농민들은 짚신 시장을 점령한 고무신에 반기를 들었고, 고무신 회사는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고무신과 애국심을 연결시켰다고 한다) 일제 감정기에 이런 광고가 실렸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닌가 싶다.
외국의 광고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어떤 리듬으로 영상을 편집하는지, 어떤 소재로 소비자를 자극하는지 살펴보는 게 흥미롭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애플의 광고다. 애플의 광고는 시간이 흐른 후에도 찾아보는 경우가 많은데, 물건을 팔기 위한 목적의 광고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담겨 있는 광고라서 그런 것 같다. ‘The song’이라는 제목의 크리스마스 광고는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할머니의 바이닐 음반을 찾아낸 손녀가 그 위에다 자신의 노래를 덧입혀 새로운 듀엣 곡을 만들어낸다는 내용인데, 살아온 시대가 다른 두 여자의 목소리가 화음을 이룰 때, 오래된 사진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표정을 보여줄 때, 언제나 눈물이 날 것 같다. 시간과 시간이 겹치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잊게 된다.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지만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광고 속에 녹아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광고 중 한 편으로 손꼽히는 애플의 ‘1984’ 광고 역시 그랬다. 상품을 광고하기보다는 이야기를 광고했고, 정신을 보여주었다. <블레이드 러너>의 리들리 스코트에게 감독을 맡긴 이 광고는 “왜 1984년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다른가?”라는 문구와 함께 ‘PC 혁명’을 예견했다. 리들리 스코트와 조지 오웰을 통해 매킨토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애플의 상징 스티브 잡스는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에도 문화적 코드를 자주 이용했다. 주주총회를 할 때에도 밥 딜런을 인용하는 사람이었다.
애플의 회장인 잡스가 제일 먼저 무대에 올라 주주총회 개회를 선언했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밥 딜런의 20년 전 노래 가사를 음미하면서 주주총회를 시작할까 합니다.” 그는 살짝 미소 지은 후 앞에 있는 원고에 간간이 시선을 던지며 <더 타임스 데이 아 어체인징(The Times They Are A-Changin’)>의 2절 가사를 읊었다. 잡스는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노랫말은 이렇게 끝났다. “지금의 패자는 훗날 승자가 되리.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니.” 이 노래는 무대에 선 백만장자 회장으로 하여금 반문화적인 자아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찬가였다.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이제 문제를 풀어보자. 문제에 등장한 광고는 실제로 방송된 것이었다. 나는 극장에서 이 광고를 본 후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제를 드러내는 경박한 방식에 놀랐고, 광고를 보면서 몇몇 사람들이 웃는 걸 보며 놀랐다. 실제 방송된 정답은 2번이었다. 케이팝 콘서트 티켓을 구해주었다는 이유로 과장에서 차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것일까. 승진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더라도 그런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게 가능한 것일까. 아무래도 좀 심했다. 원래의 정답은 2번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정답은 5번이다. 화장품 광고 중에서도 비슷한 게 있다. 명품백을 ‘득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 다음에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 1. 잠을 줄여 투잡을 하고 돈을 모은다. 2. 친구를 끊고 돈을 모은다. 3. 친구들과 절교를 하고 돈을 모은다. 4. 통장을 계속 보며 돈을 모은다. 답은 남친을 사귄다는 것이었고, 다음 장면에서 남자 친구가 명품백을 선물한다. 이 광고도 좀 심했다.
엘리자베스 아치볼드가 쓴 『옛날 책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에는 옛 사람들이 알려주는 인생의 기술을 만날 수 있다. 1558년 지오반니 델라 카사의 『예절 수칙』에 나오는 ‘농담하는 법’을 광고주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농담을 했는데 청중이 웃어주지 않는다면, 우스갯소리를 그만두고 다시는 하지 마라. 문제는 청중이 아닌 당신에게 있으니 (…) 원인은 마음의 움직임 때문인데, 마음이 즐겁고 명랑하면 말하는 이의 기민한 정신과 좋은 습관이 드러나고 증명된다. 특히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그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품위와 매력이 없다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터이니, 멍청한 사람이 되도 않는 농을 지껄이는 듯 보인다. 엄청난 뚱보가 꽉 끼는 옷을 입고 산만 한 엉덩이를 흔들며 날뛰듯 춤추는 것처럼.
농담을 자주 구사하는 나 역시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누군가 웃지 않는다면, 문제는 내게 있는 것이다. 웃지 않는 사람을 탓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마지막 한 문장은 빼고 싶다. 춤을 추는 건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어떤 춤을 추든 무슨 상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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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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