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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는 두 가지 방법

열다섯 번째 문제. 만약과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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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보>는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매카시즘의 광풍 때문에 무려 11개의 가명을 카드 돌려 막듯 돌려 막으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던 달튼 트럼보의 이력 때문일 수도 있고, 탁자와 소파와 욕조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쓰는 그의 열정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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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번째 문제. 만약과 체험    

 

<문제>

 

다음은 <로마의 휴일>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의 삶을 다룬 영화 <트럼보>에 등장하는 대화입니다. 트럼보와 그의 동료 아렌 하이드와의 대화에서 빈칸에 알맞은 대화를 골라보세요. (극장에서 한 번만 본 대화라 세세한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잘나가던 시나리오 작가 트럼보와 하이드는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고, 저예산 영화의 시나리오를 가명으로 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외계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소녀에 관한 시나리오 회의를 하던 두 사람은 자신이 진짜 쓰고 싶은 작품들에 대해 얘기하는데)

 

트럼보 :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야기가 있어.

하이드 : 어떤 이야기인데?

트럼보 : 아내와 스페인 여행 중에 투우장엘 가게 됐어. 투우사가 황소에게 칼을 찔러 넣었는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환호하더군. 큰 투우장에서 딱 세 명만 소리를 지르지 못했어. 나랑 아내랑 펜스 근처에 서 있던 소년.

하이드 : 소년?

트럼보 : 그 아이는 투우장을 바라보며 울고 있더군. 왜 그랬을까?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그 아이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하이드 : (                 )

 

1) 자네가 궁금하다면 내가 가서 조사해오지.
2) 그 아이가 길렀던 황소겠지. 당연한 얘기 아닌가.
3) 자네가 시나리오로 써보면 알게 되겠지.
4) 우리가 그걸 같이 써보면 어떻겠나?
5) 좋아, 그 소년을 외계인을 임신한 소녀와 결혼시키자고.

 

 

<해설>

 

지난 회에 폴 오스터의 타자기 얘기를 한참 했는데, 이번에도 타자기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영화 <트럼보>를 보고 나면 타자기를 연주하고 싶어진다. 트럼보는 타자기를 치는 게 아니라 연주하는 것 같다. 잔뜩 웅크린 채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간절하게 자판을 누른다. 지금도 귓속에서 타자기 소리가 어른거린다. 피아노 치던 글렌 굴드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트럼보의 집 밖으로는 끊임없이 타자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트럼보>는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매카시즘의 광풍 때문에 무려 11개의 가명을 카드 돌려 막듯 돌려 막으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던 달튼 트럼보의 이력 때문일 수도 있고, 탁자와 소파와 욕조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쓰는 그의 열정 때문일 수도 있다. 딸의 생일에 욕조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너덜너덜해진 시나리오를 매만지면서 다음 대사를 생각하는 트럼보의 모습과 맞닥뜨리면, 글쓰는 게 저렇게 재미있는 작업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방을 서성거리며 주인공의 다음 대사를 떠올릴 때의 긴장감과 짜릿함을 알 것이다.

 

달튼 트럼보와 아렌 하이드가 상의하면서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는 장면은 글 쓰는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만하다. 이 장면에는 ‘글쓰기의 첫 단추는 어떻게 꿰는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의 답변이 담겨 있다. 아렌 하이드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는 최고이지만 영화에서는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루이 C. K.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이 장면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써오라는 요청을 듣고는 외계인이 농장 소녀에게 노동법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작품을 써간다. 당연히 영화사 대표에게 퇴짜를 맞는다. 트럼보와 하이드는 외계인이 농장 소녀를 임신시키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바꿔 나간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만약’으로 시작하는 설정이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서 노동자로 살아가야 한다면? 외계인이 농장의 소녀를 임신시켰다면? 아이들이 외계인을 농장에 숨겨주었다면? 스타니슬라브스키는 이 방법을 ‘마법의 만약’이라고 불렀다. 스타니슬라브스키는 ‘만약’이라는 마술을 연기자에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만약’은 만병통치약과도 같다. 만약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이 우주를 날 수 있게 만들 수도 있고, 사람이 개미보다 작아질 수도 있다. 만약에 만약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작가들이 글을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체험’이다. 체험은 단순히 어떤 일을 겪어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체험은 풍경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일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문제의 답을 미리 밝혀야겠다. 하이드는 트럼보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직접 써보면 알게 되겠지.” 작가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어떤 이야기든 말로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 써보면 알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써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는 법이다. 주인공은 왜 배신을 할 수밖에 없는지, 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어째서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는지, 써보면 알게 된다.

 

작가는 ‘만약’과 ‘체험’이라는 두 가지 날개를 달고 글을 쓴다. 만약이 없는 체험은 퍽퍽한 닭가슴살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고, 체험이 없는 만약은 ‘앙꼬 없는 찐빵’의 맛일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잘 구슬려 한 방향으로 몰고 갈 때 이야기의 맛이 살아난다. 같은 방향으로 몰기 힘들면 두 마리의 토끼를 싸움 붙인 다음, 둘 다 힘이 빠졌을 때 잡아채기라도 해야 한다.

 

좋은 이야기의 특징은 ‘만약’과 ‘체험’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으로 시작했지만 ‘만약’이 끝까지 살아남으면 안 된다. 이야기의 어느 지점에서는 만약을 죽여야 한다. 혹은 만약을 넘어서야 한다. ‘만약 지구를 향해 거대한 혜성이 날아들고 있다면?’이라는 이야기를 풀어 나갈 때, 중요한 것은 지구와 혜성이 아니라 지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맥키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는 이런 설명이 나온다.

 

“글쓰기에 영감을 주었던 생각이 완성된 글에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제 자체는 그렇게 값진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있는 한은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이야기에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에는 이야기 자체의 진전을 쫓아가기 위해 원래의 생각을 버릴 수도 있다. 문제는 글쓰기를 시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계속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들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다 알고 길을 떠나는 경우란 드물다. 글쓰기는 발견의 과정이다.”

 

백 번 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시 한번 인용하자면, ‘써보면 알게 된다.’ 쓰다 보면 경험하게 되고, 쓰다 보면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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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중혁(소설가)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키> 저/<고영범>,<이승민> 공역22,5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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