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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이봐! 난 빌 브라이슨이 되기로 했다고!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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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빼 마르고 신경질적인 작가는 전세계에 걸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기처럼 존재해왔으니, 거구의 뚱뚱한 작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실로 줏대있고, 개성있고, 희소성 있는 길이 아닐 수 없었다.

3. 30.

 

오바마 연설문인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변화』를 읽었다.
연재중인 정치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는데, 착각이었다. 영어 연설문을 들을 때는 꽤나 설득적이고 가끔씩은 감동적이라고까지 여겼는데, 번역된 글로 읽으니 공문서 같다. 

 

결국, 오바마 연설의 힘은 그의 눈빛, 외모, 제스처, 어투, 목소리 같은 외부적 요소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갖고 있는 외형적 도구는 일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와 같다. 그렇기에 오바마의 육체는 미디어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일찍이 미디어 학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다(Media is the Message)’라고 하지않았던가. 그의 주장이 오바마의 육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즉, 오바마의 육체가 메시지인 것이다. 

 

오바마의 연설에 숨겨진 기술을 훔쳐와 이를 작가에게 적용시켜보니, ‘작가의 외형이 곧 작품이다’ 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살을 빼야겠다,
고 다짐하고, 식사대신 방울토마토를 먹었는데, 맛있어서 평소 식사량보다 더 먹어버렸다. 

 

 

4. 3.

 

일요일이니 기분이나 풀어볼 겸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을 읽었다.

따스한 햇빛이 쏟아지는 노천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가 종종 고개를 젖혀보면, 몇 시간 동안이나 햇빛 줄기 안에서 먼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햇빛이 물줄기처럼 흐르는 허공에서 먼지가 춤추는 광경을 멍하니 보는 걸 좋아한다. 얼마만에 이런 자연의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건 그렇고, 빌 브라이슨의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상하게 그의 책을 펼칠 때마다 강력한 향에 끌려 인도식당에 들어간 것 같지만, 어쩐지 한 입 두 입 먹다보면 후각이 무뎌져 그 다음부터는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게 되는 기분이 든다(읽다보면 너무 많은 수사와 수다에 지쳐버려 무감각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확실히 세밀함이 떨어지는 작가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사실 나는 데뷔초부터 ‘이 양반 한국의 빌 브라이슨이군’ 하는 평을 직?간접적으로 여러차례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아니. 내 책이 그리도 뒷심이 없단 말인가?’하며 자책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이니 이번에야 말로 뭔가 ‘절도(竊圖)’할게 없나 싶어 작정하고 읽었다.
 
마침 몇 주전에 다녀온 벨기에 이야기가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시니컬하고 불만이 많다는 빌 브라이슨도 유독 벨기에의 ‘브뤼허(Bruge)’에 관해서만은 갑자기 ‘앨리스 먼로’라도 된 양 묘사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운하 안쪽에 자리 잡은 거리를 하루 정도면 모두 다녀볼 수 있었다. 온종일 그렇게 걸었는데 어느 거리를 가봐도 그곳에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들어가보고 싶지 않는 술집이 하나도 없었으며, 내 것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경치가 없었다. 그곳 주민들이 그림 같은 집에서 실제로 생활하며, 예쁜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자갈돌이 깔린 거리에서 개와 산책하며, 세상이 그네들의 삶처럼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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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허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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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허의 한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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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허의 저녁

 

잠시 앨리스 먼로의 손가락을 빌린 듯한 이 대목을 빼고는, 나머지 모든 페이지에 유럽 여행을 하며 겪은 불만, 유럽인에 대한 험담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그의 재능이 쏟아부어져 있다. 나는 ‘과연 빌 브라이슨이군’ 하며 읽었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뭔가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기 보다는 불평을 늘어놓는다는 게 나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여,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에게서 훔쳐올 게 뭐라도 있나 싶어, 그와 나의 차이점에 대해 분석해보았다. 결과는 아래와 같다. 
 
 1. 영어로 글을 쓴다.
 2. 나보다 일찍 태어났다.
 3. 미국인이다.
 4. 거구다.
 
나는 1,2,3의 분석 결과에 좌절했다. ‘절도일기’라는 콘셉트 자체가 무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나, 금세 희망을 찾았다. 바로 4번의 ‘거구다’라는 변화 가능성을 한껏 품은 문장에서였다. 이 미래지향적 문장이 마치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 듯했다. 
 
그러나, 이 결론 역시 금세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은 바로 며칠전 읽은 오바마의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변화』에서 얻은 결론과 완전히 대치되기 때문이었다.
즉, 오바마처럼 살을 빼는 혹독한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빌 브라이슨처럼 되는대로 기름진 음식을 처먹으면서 아무렇게나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갈래길에 서야 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나 자신도 쉽게 깨달았으니, 그건 바로 빌 브라이슨의 길이 훨씬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빼빼 마르고 신경질적인 작가는 전세계에 걸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기처럼 존재해왔으니, 거구의 뚱뚱한 작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실로 줏대있고, 개성있고, 희소성 있는 길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실히 뚱뚱한 인간이 불만을 쏟아내면 ‘저 양반 몸을 봐. 되는대로 먹고 되는대로 말하는 인간이라구. 이해하라구’라며 동정을 살 만하다. 하여, 나는 과감히 빌 브라이슨의 몸매를 절도하기로 했다. 이제 이 칼럼은 문장과 구성과 개요뿐 아니라, 식사법까지 절도한다.
 
나의 혁명적인 결론을 자축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맥줏병을 꺼내 잔에 콸콸콸 쏟아부은 후, 바이킹처럼 바닥에 맥주를 마구 흘리며 마셨다(아내가 눈총을 줬지만, ‘이봐! 난 빌 브라이슨이 되기로 했다고! 인세를 현금 다발로 받아와 엉덩이를 찰싹 찰싹 때려줄게!’라고 마음 속으로만 소리친 후, 조용히 바닥을 닦았다). 안주로 소시지를 구운 뒤 마요네즈도 듬뿍 찍어 발라 먹었다. 혹시나 소화가 될까봐, 먹다가 지쳤을 때 바로 자버렸다. 
 


4. 5.

 

지난 이틀간 빌브라이슨처럼 되려고 과식을 했다가, 결국 배탈이 나버렸다.
 
화장실을 스무 번 넘게 다녀왔다.
 
글을 쓰느라 책상에 앉은 시간보다, 빌 브라이슨에서 나로 돌아오기 위해 항문으로 눈물을 흘린 시간이 더 길었다.
 


4. 7.

 

화장실을 열 번 넘게 다녀왔다. 


 
4.8.

 

집필 의자보다 화장실 변기에 더 오래 앉아 있었다.
 
내가 화장실에 앉은 시간을 합하면 장편 소설 하나를 쓸 시간은 될 것이다.
 


4.10.

 

나는 아직도 장염과 전투중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직접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아마 나의 전투만큼 곤란하진 않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빌 브라이슨이 되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거구의 시니컬한 글쟁이가 되어도, 나는 늦게 태어났고(책이 좋던 시절인 90년대에 데뷔해 독자를 확보하지 못 했다), 한국인이고(지하철에서 책 보다는 스마트폰을 보는 풍경에 익숙해져있는 나라의 작가다), 영어로 글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과연 프루스트가 4000쪽 짜리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글로 썼다면, 여동생을 사랑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번역되어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코난 도일은 장르소설가라 불리며, 설움을 겪지 않았을까). 
 
여하튼, 이 긴 사고(思考)와 사건 뒤에 나는 다시 소식을 하고, 운동을 하기로 했다.
 
아침에는 샐러드를 먹었고, 오후에는 8km를 달렸다. 
 
이 참에 술을 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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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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