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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초상화를 기대하는 순간

열한 번째 문제. 먼지로 그림 그리기 프랜시스 베이컨과 데이비드 실베스터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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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읽고 대화를 하지 않는 것 역시 문제다. 책에는 반론이 없고, 피드백이 없다. 책을 무조건 신뢰하는 순간 벽에 갇히게 된다. 언어와 비언어 사이, 말과 글 사이에 인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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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문제. 먼지로 그림 그리기

 

<문제> 

 

20세기 회화 역사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두 사람이 진정으로 서로를 혹평하면서 그것을 통해 상대방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것.” 우정을 쌓기가 쉽지 않겠다. 다음은 프랜시스 베이컨과 25년 동안 수많은 인터뷰를 했던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대화다. 빈칸에 알맞은 대화를 골라보세요.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에서 발췌)

 

실베스터 : 당신은 보는 사람이 작품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때로 사람들의 아주 형편없는 오해가 거슬리지는 않습니까?

 

베이컨 : 나는 오독에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조차도 내가 한 작업의 상당 부분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저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그릴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지는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내 작품을 구입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흥분을 위해 그림을 그렸고 생계를 유지하려면 다른 일을 해야 할 거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나는 그림이 판매될 정도로 점점 운이 좋아져서 작품 활동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어도 다른 사람들이 내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관심합니다.

 

실베스터 : 정말로 보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림을 그립니까?

 

베이컨 :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을 위해 그림을 그리겠습니까? 보는 사람을 위한 작업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겁니까? 보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하는 겁니까? 나는 나 말고는 그 누구도 흥분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 다른 사람이 내 작품을 좋아해주면 나는 언제나 놀랍니다. 내가 몰두하는 일을 통해 생활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행운이라면 말입니다.

 

실베스터 : 그런 입장이라면 주문 받은 초상화는 거의 그리지 않겠군요.

 

베이컨 : 네, 자주 그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                  ).

 

1)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상화를 통해 돋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2)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성된 초상화를 받고도 돈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몇몇 사람들은 초상화를 그릴 만큼 아름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4) 몇몇 사람들은 초상화가 완성된 다음 자신의 사진과 그림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5)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사람 중에는 제가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설>

 

음악가나 화가의 인터뷰를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 너머에 있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고, 그걸 다시 말로 설명해내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난다. 추상적인 듯하지만 구체적이고, 뜬구름 잡는 듯하지만 땅 위에 굳건하게 발을 딛고 있는 언어들이다. 음악이나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언어와 언어 너머의 것들을 설명한 적이 있다.

 

“무엇인가를 언어로 표현해버리면 아무래도 현실에 있는 ‘진실’과는 어긋나버리지요. 그러나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어떻게든 ‘진실’을 향해 돌진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문학과 지성사 

)

 

음악에 감동하고 그림에 감동한 사람들이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떤 예술의 길을 추구하든 어떤 작업을 지속하든 인간의 모든 행동들은 ‘언어를 매개로’ 설명해야 한다. 음악과 그림을 감상하는 데는 언어가 필요 없다. 작가는 언어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음악과 그림으로 얻은 감동을 언어로 번역하고 싶어한다.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언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찾지 못하겠지만, ‘진실을 향해 돌진’해야 한다. 언어는 불분명하고 불충분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돌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인간은 충분하지 못한 언어로 사유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나은 존재가 됐다.

 

말은 글보다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글의 경우에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세세한 논리가 내용을 뒷받침해 주지만, 그래서 오해의 소지가 적지만, 말의 경우에는 굵직한 논리만 부각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듣고 있는 말을 재구성한다. 다르게 알아듣는다. 말과 글 사이에, 인간의 숙명이 있다. 대화를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문제다. 대화에는 치밀하고 자세한 논리가 없다. 언뜻 논리적인 말들도 받아 적어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오직 책을 통해서만 언어의 세세한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문장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수십 수백 번 고친다. 오해가 없도록, 오해가 적도록, 계속 고친다. 책만 읽고 대화를 하지 않는 것 역시 문제다. 책에는 반론이 없고, 피드백이 없다. 책을 무조건 신뢰하는 순간 벽에 갇히게 된다. 언어와 비언어 사이, 말과 글 사이에 인간들이 있다.

 

자, 이제 문제를 풀어보자. 예술가들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내용은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작업하지 않는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 만들고 창작한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하고, 소통으로서의 예술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얘기 같기도 하다. “이렇게 소통에 관심이 없으니 사람들이 예술을 외면하지.” 같은 비아냥을 듣기에 딱 좋은 말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인터뷰에서 저런 말을 종종 했다. “독자들이 작가님의 책을 어떻게 읽었으면 좋겠습니까?”라거나 “어떤 독자를 상상하면서 소설을 씁니까?”라고 물어오면 대답할 말은 하나뿐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을 뿐 아니라 글을 쓰다 보면 그럴 겨를이 없다. 쓰기도 바쁘고, 내가 나를 설득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누굴 신경 쓰고, 누굴 챙기고, 누가 내 글을 봐줄지 염두에 두는 일은 상상도 못한다. 문제에 나온 베이컨의 말처럼 “궁극적으로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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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1971

 

프랜시스 베이컨은 먼지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Bretagne)를 그릴 때 작업실의 먼지를 사용했다. 바닥의 먼지를 모두 그러모은 다음 헝겊으로 먼지를 닦아 젖은 물감에 올려놓았다. 어떤 그림에는 물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바닥의 먼지를 얇게 한 겹으로 발라 회색 옷을 표현하기도 했다. 베이컨은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사물의 영속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플란넬 양복의 살짝 보풀이 이는 특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먼지를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에 먼지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먼지가 괜찮은 회색 플란넬 양복과 얼마나 흡사한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작업실의 먼지를 그러모으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떠올린다. 금을 채취하듯 조심스럽게 회색의 먼지를 수집하는 그를 떠올린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작업실 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리사가 식당 한쪽에 바질이나 로즈마리 같은 허브를 키우듯 베이컨은 작업실 곳곳에 먼지를 배양했던 것이다. 먼지를 수집할 때 그는 넋이 나갔을 것이다. 먼지가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을 것이다. 창작의 과정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 순간에는 오직 내적인 완결성만이 중요할 뿐이다. 먼지가 회색 플란넬 양복의 표면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 순간에는 그림을 사는 사람도 그림을 파는 사람도 잊게 될 것이다. 소설을 쓸 때도 비슷한 순간과 맞닥뜨린다. 종이 위에 쓴 어떤 문장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순간, 작가는 현실을 잊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초상화는 작가가 지고 들어가야 하는 게임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그릴 수 없다. 답은 1번이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상화를 통해 돋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또는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지요. 그게 바로 초상화 작업의 특이한 점입니다. 화가가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그 초상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볼 때, 음악을 들을 때, 소설을 읽을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혹시 작가에게 어떤 초상화를 부탁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내 생각대로 작품이 완결되길 바라는 것은 아닌지. 모든 작품을 초상화처럼 대할 때 우리는 자주 실망할 것이다. 작가가 하려고 했던 ‘무언가’를 놓치고 말 것이다.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대로 해석할 권리가 있고, 작가 역시 그러길 바라고 있겠지만, 우리가 초상화를 기대하는 순간 거대한 작품은 바람 빠진 공처럼 쪼그라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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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중혁(소설가)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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