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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의 우주 대모험
우주 덕후 드림팀이 만들어 낸 결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소설 텍스트에서 의문이 생기더라도 소설 속에서 얼마든지 답을 찾을 수 있으니 굳이 작가와 가깝게 지낼 필요가 없겠다고 큐브릭은 생각한 듯하다.
표현이 다소 이상하지만 나는 1995년을 ‘예술영화의 해’로 기억한다. 지하철에서는 늘 누군가가 <씨네21>이나 <프리미어> 같은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가 단관 개봉으로 몇 만 명을 모아 화제가 되던 시절이었다. 잡지 <키노>가 창간하던 그 해에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캠퍼스에서는 영화동아리들이 이런저런 예술영화를 소개하느라 분주했다. 다들 ‘이 정도쯤은 봐줘야지’ 하는 열띤 얼굴로 영화제에 참여했고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이 뭐냐면 말이지”라는 식의 진지한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쇼생크탈출> 같은 영화를 보고 감동하면 대놓고 한심해하는 분위기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봤다. <노스탤지아>도 보고 <400번의 구타>도 봤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프랑수와 트뤼포)”이라는 선배의 얘기를 듣고, 두 번씩 봤다. 하지만 도통, 그게 무슨 재민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난감했다. 그중에서 가장 나를 난감하게 했던 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였다.
지난달에 ‘스탠리 큐브릭 전’을 구경하러 서울시립미술관에 다녀왔다. 큐브릭이라는 인간이 궁금해서 갔던 게 아니다. 약간 궁금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괴팍하고 창조적이었던 사람이라고 하니 보고나면 뭔가 출판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 같은 게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더 컸다.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기일 텐데 스탠리 큐브릭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외동으로 자랐고 아버지에게 배운 체스와 사진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 영화관에 드나들며 영화에 심취했는데 특히 이 대목이 눈에 띈다. 그는 정말 많이 읽었다고 한다. 책상에는 항상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도 독학으로 익혔다. 아이디어가 필요하면 서점에 갔다. 그러고는 “영화로 만들기에 적합한 소재를 찾아 게걸스럽게 읽었고 상상력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찾아내기 전에는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영화들은 거의 전부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한다. <롤리타>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소설 『롤리타』를, <시계태엽 오렌지>는 앤소니 버제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베리 린든>은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을, <아이즈 와이드 셧>은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최근에 한국어판으로 번역된 『큐브릭』의 저자 제임스 네어모어가 “스탠리 큐브릭이 작가(주의) 이론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로 대부분의 영화가 문학작품의 각색이었기 때문”임을 지적했을 정도다. 그거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궁금했던 건, 자신의 소설이 잘못 해석될까봐 영화화를 꺼려하는 ‘예민한’ 작가들과, 까다롭기로 소문난 완벽주의자 감독의 관계가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소설을 영화화할지 말지를 결정할 때 큐브릭이 최우선으로 두었던 기준은 ‘자신이 푹 빠질 만큼 독창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였다. 하지만 큐브릭이 ‘완벽한 영화작가’의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독창적인 내러티브’를 ‘자신만의 독자적인 내러티브’로 재해석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자료에 따르면 큐브릭은 원작자들과 데면데면했거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예컨대 영화 <샤이닝>을 보고 난 스티븐 킹이 화가 난 나머지 큐브릭을 향해 “초자연적 세계에 대해 학술적으로조차 생각하기 힘들어하는 냉혹한 사람”이자 “오버룩 호텔의 철저한 비인간적 사악함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혹은, 소설 텍스트에서 의문이 생기더라도 소설 속에서 얼마든지 답을 찾을 수 있으니 굳이 작가와 가깝게 지낼 필요가 없겠다고 큐브릭은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그런 건지 ‘스탠리 큐브릭 전’에 전시된 수백 장의 사진 가운데 감독과 함께 찍힌 작가는 딱 한 명뿐이었다. 큐브릭은 그에게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소설가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지요. 요람 같은 지구에서 우주 속의 미래를 향해 손을 뻗는 인류의 모습을 당신만큼 훌륭하게 보여 준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소련과 미국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로켓을 쏘아 올리며 우주개발경쟁에 박차를 가하던 1950년대에 큐브릭은 차기작을 염두에 두고 대중적인 과학서적과 수준 높은 과학서적을 탐독하며 지식을 쌓아갔다. 그중에는 아서 클라크의 단편 『파수병』(『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0~1953』에 포함)도 있었다. ‘달에 도착한 탐사대가 빛을 내뿜는 수정 피라미드를 발견하고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짐작한다’는 스토리에 고무된 큐브릭은 우주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964년 4월 23일,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온갖 과학서적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여 해당 분야의 전문가나 다름없는 큐브릭과 걸출한 에스에프 작가이자 NASA의 프로젝트에도 참여한 전력이 있는 클라크는 이내 의기투합하여 “130쪽짜리 트리트먼트(시놉시스와 시나리오의 중간단계로, 일종의 영화 제작 기획안)”를 쓴다. 이때 자문역을 맡은 이가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이었다고 하니 이쯤 되면 드림팀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 이들이 완성시킨 트리트먼트는 시각적 상상력을 추구하며 언어를 배제한 영화와 모든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한 소설로 각각 ‘진화’한다.
“시나리오는 여태껏 인류가 고안해 낸 집필 형식 중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가장 떨어집니다. 시나리오로는 분위기나 이미지를 전달하기 어려워요. 대사는 전달할 수 있지만, 시나리오의 관습을 지나치게 고수하면 대사가 묘사하는 내용은 전보처럼 간략해지지요. 때문에 처음 집필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아서 클라크와 내가 쓴 대략 4만 단어 분량의 산문이었습니다. 그런 후 나는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썼고, 아서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표현하려고 소설과 영화라는 상이한 매체가 시도한 결과물을 세상에 제공한 것이죠. 두 작품이 보여주는 차이는 흥미롭습니다. 정말로, 영화 전편을 보지 못한 채 일부분만을 보고 본질적으로 오리지널 문학에 해당하는 작품을 쓰는 건 역사상 유례가 없던 상황이었어요.” 『스탠리 큐브릭-장르의 재발명』 144쪽, 172쪽
되풀이하자면, 같은 제목 같은 소재를 두고 다른 결과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큐브릭이 말한 대로 두 작품이 보여주는 차이는 무척 흥미롭다. 얼마나 흥미롭냐면, 소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읽고 나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봤더니, 이건 뭐 내가 20년 전에 봤던 영화랑 완전히 딴판으로 느껴져서 놀랐을 정도다. 그 역도 얼마든지 성립하지 않을까. 모르겠지만, 부연하자면 나는 영화보다 소설이 더 좋았다. 아직 내 의식은 큐브릭이 영화를 통해 깨고자 했던 “경험의 협소한 영역”에 구속돼 있는 모양이다. ‘스탠리 큐브릭 전’에 한 번 더 다녀와야겠다. 전시는 오는 3월 13일까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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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남이고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책을 만든다. 가끔 이런저런 매체에 잡문을 기고하거나 라디오에서 책을 소개하거나 출판 강의를 해서 번 돈으로 겨우 먹고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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