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함께 행운을 빌어요
제이슨 므라즈 & 콜비 카레이 <LUCKY>
그래, 올해는 이 약발로 가는 거다. 제이슨 므라즈의 목소리처럼 달콤한 한 해를 만드는 거다. 중간에 지쳐서 분위기 다운되면 또 이 음악을 들으면 되는 거다.
행운이란 나와 거리가 먼 단어인가보다. 세상에, 683번이나 로또를 샀는데 숫자 세 개 맞은 적도 없다. 따끈한 새해가 왔지만 일자리도 없고, 돈도 없고, 애인도 없고, 결정적으로 유머감각도 떨어졌다. 정초부터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요)을 외칠 위기다.
오래전 런던에서 일식 배달 알바를 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토바이 그립을 땡겨 돈 벌었는데 외국에서도 할 게 오빠달려 뿐인 팔자였다. 어쨌든 그 작은 일식당엔 스무 명 넘는 직원이 있었다. 대부분 런던 시민이 아니었고, 언젠가 런던을 째야 하는 다국적 노동자들이었다.
관리직 매니저는 필리핀 여자였고, 쇳소리로 고함을 좀 지르긴 하지만 퍽 감성적이었다. 그녀는 런던을 스쳐가는 알바들에게 분리불안이 있었다. 어느 날 매니저 에밀리가 급히 나를 불렀다.
“박상박상, 배달 다녀올 때 커다란 카드 한 장 사 올래?”
“왜요?”
“어떡해, 메이가 그만둔다잖아.”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싱가폴에서 온 메이는 우리 가게 대표적 꽃미녀였고 일도 잘했다.
“슬프지? 응?”
슬펐다. 영어를 좀 잘하게 되면 고백할 생각이었는데 늦어서 슬펐다. 나는 메이를 위해 런던 최고의 문구점에 들러 가장 근사한 카드를 골랐다. 펼치면 A4 두 장만한 크기였다. 거기에 메이 몰래 직원들의 메시지를 받았다. 인상 쓰며 진지하게 일할 때와는 달리 모두들 선량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남겨줬다. 각종 달콤한 언어들이었다. 다들 먹고 살기 빠듯한 런던의 이방인 신세였고, 처절한 생존과 싸우는 중이었지만 낭만만큼은 메마르지 않았던 거다. 그 중에서 지금 기억나는 문구는 이거다.
널 만났었다는 건 정말 행운이었어. 내내 어여쁘길.
그 문구가 떠오르자 오늘의 주제곡 <LUCKY>도 떠올랐다. 제이슨 므라즈와 콜비 카레이의 아름다운 듀엣곡. 이 곡의 노랫말에도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Lucky I′m in love with my best friend (최고의 친구와 사귀어 행운이에요)
Lucky to have stayed where we have stayed (내가 있었던 곳에 있었던 게 행운이에요)
아아, 제이슨 므라즈의 목소리를 들으며 녹아내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음악을 당대에 들으며 살 수 있는 한 이번 생은 망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촉촉한 메시지들이 듬뿍 담긴 그 카드를 이별파티 때 건네자 그녀의 눈도 금방 촉촉해졌다. 런던이야 뭐 일터에서 똥군기도 없고, 나이랑 상관없이 서로 막 친구였다. 그렇게 매일 만나던 친구 중 하나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남은 이들도 아쉬워서 눈이 젖었다. 나는 맥주를 많이 마셔 식도가 젖었다.
그 뒤로 여섯 명 정도가 그만뒀다. 비자가 끝나거나, 학업을 완료하고 돌아가는 시즌이었다. 그때마다 우린 정성껏 카드에 메시지를 적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떠나야만 했을 무렵, 가게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장사가 통 안 되더니, 인원이 줄었고, 금발의 영국인 여사장은 가게에 올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지점이 없어지니 어쩌니, 다른 지점 하나는 이미 없어졌느니, 시급을 줄일 거니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감성 매니저 에밀리도 다른 지점으로 좌천되고 눈매가 날카로운 새 매니저가 부임해 큰 목소리로 운영방식을 뜯어고쳤다.
그 와중에 배달마저 하루에 한두 건 있을까 말까였다. 나는 잘리지 않기 위해 홀서빙과 주방일까지 자진해서 도왔다. 주급으로 일주일을 겨우 사는데 잘린다는 건 그 다음 주부터 당장 길바닥에 나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거리에 나가 팸플릿을 돌렸고, 오토바이에 싣기엔 버거운 물건도 배송이 필요하면 눈치껏 내가 실어 날랐다.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넓적한 박스들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 오토바이를 몰며, 한 시간 거리의 딴 지점에 가는데 타워 브릿지 앞에서 바람이 장풍을 날려 오토바이와 함께 템즈강으로 뒤집어질 뻔도 했다.
그렇게 발버둥치자 가게에서 잘릴 염려는 줄었지만 타이밍 안 좋게 비자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하필 딱 내 비자가 끝날 때쯤 비자법이 바뀌더니 남들 다 하는 연장에 실패했고, 등 떠밀려 고국에 돌아가야만 했다. 내겐 빌어먹을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내가 그만두기로 한 날은 그날따라 가게 분위기가 더 최악이었고, 애틋한 이별파티는 기대도 안 했다. 퇴근 무렵 직원들은 다들 지쳐있었다. 힘없이 작별인사를 나누는데 뱀눈으로 매출 계산을 하던 매니저가 쓰윽 카드를 내밀었다. 열어보니 맨 앞에 사장 캐롤라인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고마워, 박상. 정말 열심히 일해준 거. 영원히 기억할게.’
경영난으로 바쁘던 사장이 언제 와서 이걸 쓰고 갔나 싶었다. 그 아래에는 같이 일했던 직원들의 진심어린 메시지들이 적혀 있었다. 장난기 많던 일본인 웨이터는 ‘박상의 매우 건장한 성생활을 바람!’ 이라고 썼고, 우리 식사를 만들어 주던 스리랑카인 주방보조는 ‘내 카레를 지겨워하지 않은 놈은 네가 처음이었어.’ 라고 썼다. 나머지 모두 코끝이 찡해질 만큼 따듯한 메시지들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문구는 이거였다.
넌 충분히 웃겨. 제발 그만 웃겨. 아 이 말 쓰면서도 웃기네... 보고 싶을 거야.
영국에서 돌아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이래저래 안 풀리고 또 망해버려 이삿짐 싸다 그 카드를 불쑥 발견했다. 잠시 미소 짓다가 돌연 눈물이 났다. 행운이 안 따르니 어쩌니 했지만 내 주위에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행운을 빌어주고, 보고 싶어 해주는, 응원해 주는 행운아였다는 걸 몰랐던 거다.
아무튼 새해다.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자니 정초부터 절망과 우울증에 잠식되었던 스스로가 겸연쩍다. 나는 털고 일어나 오늘의 주제곡 <LUCKY>를 여러 번 듣는다. 음악이 딱 그 추억의 카드 같다. 이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으니 세상의 불행이 다 스르륵 희석돼 버릴 듯한 기분이 된다. 이 곡을 식후 삼십 분마다 한 번씩 들으면 불행이란 단어를 홀라당 까먹게 되고, 지금 당장 내게 행운이 찾아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아진다.
그래, 올해는 이 약발로 가는 거다. 제이슨 므라즈의 목소리처럼 달콤한 한 해를 만드는 거다. 중간에 지쳐서 분위기 다운되면 또 이 음악을 들으면 되는 거다.
모쪼록 채널예스 독자님들께도 <LUCKY>와 함께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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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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