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시대, 진보란 무엇인가
『비판과 정명: 리영희의 언론 사상』 저자 최영묵 교수 인터뷰
우리 사회의 진보가 어느 때부터인가 ‘보수 진영을 비판하는 집단’ 혹은 ‘상대적으로 기득권 세력보다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등으로 규정되고 있다면, 이는 ‘진보진영’이 자기의 중심을 상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가 진보이기 위해서는 진보의 가치, 이념, 프레임으로 게임을 해야 합니다.
얼마 전 리영희 선생의 5주기 행사가 열렸다. 격동의 시대를 살며 이 나라 민주화와 진보에 앞장섰던 그의 빈자리가 요즘 들어 점점 커져가는 것 같다. 살기 어렵다는 아우성이 가득한 한국 사회에서 리 선생이 우리에게 전하고 간 진보의 방향과 삶의 철학은 무엇일까. 대학 시절부터 리영희 선생의 조교수로 긴 인연을 맺어 온 성공회대 최영묵 교수가 선생의 글과 그 속에 담긴 사상을 정리해 『비판과 정명: 리영희의 언론 사상』이라는 책을 펴냈다.
리영희 선생님의 삶을 다룬 책을 집필하게 된 것에 대해 "방세를 정산하다"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이 표현은 어떻게 나왔는지, 또한 어떤 계기로 방세를 정산하고 싶어지셨는지를 여쭤 봐도 될까요?
사실 리 선생님은 책도 많이 내신 데다 『역정』 같은 자전 에세이, 『대화』 같은 삶과 사상에 대한 대담집도 있어서 제가 따로 쓸 이야기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선생님이 작고하시고 '추모 논문'을 쓰면서 여러 책을 읽어봤지요. 그런데 선생님의 생애와 저작, 사회적 실천, 언론 사상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없었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저술에 대한 계보학적 정리가 부족했고 기존의 책들도 오류가 많았어요. 새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살던 일이 떠오르며 "세상에는 공짜가 없구나. 선생님이 오랫동안 방을 내주신 뜻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비판과 정명』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판과 정명』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리영희 선생님의 글들을 최대한 자세하게 정리하고 분류한 점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는 꽤 오래된 자료도 있어 구하시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나요?
리영희 선생님께서는 대략 50년간 글을 쓰시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온 책도 참 많은데 그중 판본이 가장 복잡한 책이 『우상과 이성』입니다. 1977년 11월 1일 초판이 나온 후 20일 만에 '금서'가 되었다가 1980년 3월 증보판(검열삭제판)이 나옵니다. 이어 1988년 제2개정판이 나오고, 2006년에 전집판이 나옵니다. 판별로 내용이 다르죠. 『비판과 정명』을 쓰면서 초판 『우상과 이성』을 꼭 구해야 했는데, 주변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리 선생님 댁에도 없었고요. 그러다가 2015년에 우연히 인터넷 헌책방에서 초판을 구했습니다. 책을 받고 놀랐지요. 제 손에 넘어온 책은 검찰과 계엄사의 검열 흔적이 그대로 남은 '검열본'이었거든요. 아마 검열이 끝난 후 폐기되지 않고 헌책방으로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책에서 볼펜으로 휘갈겨 쓰거나 줄을 쳐놓은 부분이 1977년 검찰이 기소장에서 문제 삼은 내용과 일치했고, 1980년 계엄사에서 삭제를 요구한 대목도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살다 보니 그런 일도 있더군요.
리영희 선생님의 제자로서 남들은 모르는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아실 것 같은데요. 리영희 선생님에 얽힌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시겠어요?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운동권' 출신의 한 제자가 찾아와 선생님께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단 알았다고 답은 하셨는데, 거의 일주일 이상을 고민하시더라고요. 리 선생님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듯 선생님은 모든 글에서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표현을 '혐오'하셨습니다. 주례사를 쓰든 추천서를 쓰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셨지요.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의 추천서에 그의 투쟁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쓰면 오히려 취업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신 것 같더라고요. 결론적으로 "늘 배운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다"라고 써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행히 그 사람은 취업이 되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글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요인 중 하나는 그분의 글이 읽기 쉽기 때문일 텐데요, 이 '쉬운 글'이 가장 돋보이는 리영희 선생님의 저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모님 이야기에서 북핵 문제를 다룬 글에 이르기까지 리 선생님의 글이 쉽게 읽히는 것은 불필요한 이론적 논의나 현학적 표현을 거의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사안의 핵심, 근저, 본질을 직접 찌르고 들어가지요. 『비판과 정명』에서는 '소품체 산문'이라고 분류한 글이 대체로 쉽고 인간적입니다. 저서 중에는 선생님의 유일한 문고판 산문집인 『인간만사 새옹지마』(1991, 범우사)가 쉽고 재미있습니다. 종교와 문화, 언론과 민족 통일 등 쉽지 않은 내용을 쉽게 풀어서 쓴 책으로는 『스핑크스의 코』(1998, 까치)를 들 수 있고, 글 중에서는 1986년 ≪외국문학≫지에 발표한 중편소설 「D검사와 이 교수의 하루」, 1993년에 쓴 「광주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비판(批判)은 우상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 정명(正名)은 사물과 사상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 보시기에 현재 우리 사회에서 비판과 정명이 가장 절실한 우상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리영희 선생님이 평생 일관되게 비판했던 수구언론, 기회주의 지식인들이 지금도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언론과 언론인, 지식인의 본업은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고, 혼란스러운 언설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최소한의 역할만 해주고 있어도 지금 같은 반인간적이고 반민족적인 권력이 판을 치지는 못했을 겁니다. 언론이 권력과 우상을 비판하고 이름을 바로 세우기는커녕 권력과 유착하고 자신의 이해관계 중심으로 세상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언론은 단 한 번도 권력이 교체된 적이 없는 대표적인 반민족적 기득권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외국 학자가 "지금 한국의 진보는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 보수를 비판하기에 급급한 정체성이 불분명한 집단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요. 리영희 선생님 때와 다르게 진보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말한 진보는 무엇일까요?
리영희 선생님이 말하는 진보란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는 것입니다. 모든 이념이나 정치체제, 심지어 기독교, 불교와 같은 종교조차도 그 중심에 인간의 가치가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면 하나의 '우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셨습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가 어느 때부터인가 '보수 진영을 비판하는 집단' 혹은 '상대적으로 기득권 세력보다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등으로 규정되고 있다면, 이는 '진보진영'이 자기의 중심을 상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이 깔아놓은 판에서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죠. 민생이 파탄 나고 국가 경제가 공황 수준으로 전락하는 데도 선거라는 판에 매몰되고 있는 것이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진보가 진보이기 위해서는 진보의 가치, 이념, 프레임으로 게임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지금 이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과 자유, 평등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늘 변화에 대해 학습하고 성찰하며, 관념적 논쟁보다는 현장으로 가서 실천하는 것이 진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삶을 단순화해야 한다(simple life high thinking)고 늘 강조하셨죠.
2015년 한 해 동안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노력하지 않는 이들의 과장된 엄살'이라 평하고, 또 어떤 이는 '삶의 위기에 처한 젊은이들의 절절한 구조 요청'이라고 진단하는데요, 이럴 때 일수록 되짚어봐야 할 리영희 선생님의 사상이나 저서가 있을까요?
리영희 선생 사상의 핵심은 휴머니즘과 사상의 자유, 사회민주주의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헬조선'이란 인간이 없고, 인간의 유대가 없고, 모든 시민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절규하고 있음에도 오로지 권력과 자본의 착취만이 난무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겠죠. 김수영 시인이 50년 전에 쓴 '김일성 만세'라는 시가 대자보로 다시 붙을 만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도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리 선생님이 말하는 '사회민주주의'란 상대적으로 인간의 욕망이 일정하게 제어되면서 시민의 자유가 극대화되는 체제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체불명의 미디어 홍수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무한으로 증폭하면서도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서는 묵살하고 있습니다. 리 선생님은 2009년 생전의 마지막 특강에서 대한민국이 파시즘 체제로 가고 있다는 점, 우리 모두 불퇴전의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그간 민주화를 통해 확보해온 우리의 '공민권'이 모두 박탈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1999년에 리 선생님의 고희 기념으로 엮은 『동굴 속의 독백』에는 이러한 사상의 궤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비판과 정명최영묵 저 | 한울아카데미
리영희의 삶을 재구성했으며 그의 사상과 지식인관(觀)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을 짚어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 평행선 같은 남북 관계, 상업적인 대중문화 등 우리 곁을 맴돌았던 숱한 과제들에 대해 리영희가 제시한 답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엄혹한 시대 속에서 결코 실행될 수 없었던 그의 해결책을 지금의 우리는 시도할 수 있을까?
세상의 허울을 거두는 ‘비판’과 그 정체를 밝히는 ‘정명’. 리영희가 남긴 이 두 가지 등불이 다시금 우리 사회를 밝혀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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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