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청교도적인 제임스 본드 007 <스펙터>
그는 과연 몇 명의 여자와 잤을까?
제임스 본드는 여자와 정말 쉽게 잔다. 처음 만난 여자가 “이름이 뭐예요?” 하고 물으면, 상대의 눈을 응시하다 그저 “본드. 제임스 본드” 하며 침대로 쓰윽 눕혀버리는 식이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007 시리즈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그 때엔 로저 무어가 007역할을 맡았기에, 당연히 ‘제임스 본드’ 하면 로저 무어가 떠올랐다. 그러고 난 후에 그가 007 역할을 그만 둔다고 할 때,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하며 어리둥절했다. 그제야 1대 제임스 본드는 숀 코네리였으며, 조지 레젠비가 단 한 편을 맡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후, 티모시 달튼이 후임으로 두 편을 맡았지만, 어쩐지 로저 무어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실제로 로저 무어는 역대 007 중 가장 많은 작품인 7편을 맡았다. 때문에, 나는 ‘007하면 로저 무어지’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가지게 됐다.
그 생각이 잠시 흔들린 건 피어스 브로스넌이 007을 맡았을 때였다. 그런데, ‘아, 이제 007은 피어스 브로스넌인가?’ 하려는 찰나 그가 물러나고 말았다. 여유 있고 유머 넘치는 그였지만 로저 무어의 잔상을 지우기에는 4편에 불과한 작품수론 부족했다. 그러다, <카지노 로얄> 이후로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이 됐는데, 피어스 브로스넌의 바통을 막 물려받았다는 느낌이 든 지금, 하차를 선언해버렸다. 하여, 아직도 ‘007하면 로저 무어지’ 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다.
영국 신사다운 절제된 움직임과 이제는 전통이 되어버린 위기일발의 순간에 부리는 유머와 여유, 게다가 몇 번의 인사말로 여인을 유혹하는 기술 등, 로저 무어를 따라올 만한 자는 아직도 없다고 여긴다. 이런 말을 하면 뭣하지만, 한 명씩 비교하자면, 숀 코네리는 어쩐지 젊은 시절부터 은퇴를 번복한 뒤 복귀한 느낌이 들었고, 피어스 브로스넌은 외화 <레밍턴 스틸>에서의 좌충우돌 이미지가 강했고, 티모시 달튼은 느끼한 난봉꾼 같았고, 조지 레젠비는 어쩐지 최규하 대통령이 떠올랐다(한 편만 찍은 탓일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고급 호텔에 딸린 헬스클럽의 전속 트레이너 같은 느낌이 들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국 ‘007은 로저 무어지’ 하는 느낌만 강해질 뿐이었다.
그나저나, 007의 역할을 처음 맡을 당시 배우들의 평균 연령은 38세였는데, (불문율처럼) 제임스 본드는 50대 미만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러니, 제임스 본드는 자연스레 40대 남자가 되는 것이다. 현재 다니엘 크레이그 역시 한국 나이로 48세다. ‘권불십년’이라고 로저 무어를 제외하고는(조지 레젠비와 티모시 달튼도 제외), 그럭저럭 십년 정도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은 셈이다. 결국 우리는 제임스 본드라는 한 가상의 인물이 40대 시절에 활약하는 모습을 봐온 것이다. 이 시리즈는 53년간 한 인물이 40대 시절에 활약한 모습을 그려왔고,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그가 40대 시절에 활약할 모습을 그릴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그가 도대체 몇 명의 여자와 잤느냐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는 여자와 정말 쉽게 잔다. 처음 만난 여자가 “이름이 뭐예요?” 하고 물으면, 상대의 눈을 응시하다 그저 “본드. 제임스 본드” 하며 침대로 쓰윽 눕혀버리는 식이다. 저항은커녕 거부하는 여자도 없다. 변태처럼 보는 여자도 없고, 뺨을 때리는 여자도 없다. 다들 기다렸다는 식으로, ‘본드. 제임스 본드’가 마치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아아. 어쩔 수 없어요’ 하는 느낌으로 침대에 훌러덩 누워버린다. 이 전통이 53년간 변형도 없이 지켜지고 있다. 아니, 더한 느낌이 든다. <스펙터>에서 제임스 본드는 뻔뻔하게도 자신이 죽인 남자의 장례식을 지켜보다 미망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 미망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입술을 탐하며 질문을 하나씩 한다. 마치 美 범죄물 형사가 정보원들에게 10달러씩 건네며 질문을 하나씩 더 하듯, 입술을 맞출 때마다 질문을 하나씩 더 한다. 그러고는 “당신이 내 남편을 죽였잖아요!”라는 미망인(모니카 벨루치)에게 ‘거 참 미안하게 됐군’ 하는 느낌으로 침대에 쓰윽 눕혀버린다. 이게 사과의 방식인지 나로서는 참으로 혼란스럽지만, 제임스 본드는 이번엔 ‘레아 세이두’를 찾아가 또 한 번 이것저것 캐묻는다. 그녀 역시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군!” 하며 쏘아붙이는데, 불과 얼마 뒤 둘이 합심하여 괴한을 물리친 뒤 갑자기 마법에 걸린 듯 서로를 탐한다. 나는 맥이 빠져 ‘세상 참 쉽게 사는군’ 하며 영화를 봤다. 이런 식으로 제임스 본드는 그간 편당 2.375차례 베드신을 선보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간 출연한 본드걸의 총 인원은 90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25편에 걸쳐 2.375명1)과 관계를 가졌다해도 그가 선보인 베드신은 59.375차례밖에 되지 않는다. 제임스 본드라면 분명 본드걸 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 혹은 등장 외 인물에게도 예의 그 마법의 대사 “본드. 제임스 본드”를 날렸을지 모를 법이다. 보수적으로 잡아 본드걸과 각각 1회씩 관계를 가졌다 가정하고, 그 외 여타 관계를 30% 정도 추가한다면 적어도 117회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본드가 40대로 제한된다는 가정 하에 십년의 세월, 즉 120개월을 나누면 월 평균 0.975회, 즉 월 1회의 관계를 가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따지고 보니 제임스 본드가 의외로 외로운 생활을 했다고 여겨진다. 그가 독신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결혼을 한 일반 남성에 비해 굉장히 청교도적인 성생활을 유지한 셈이다. 제임스 본드가 이렇게 청교도적일 줄이야. 역시 사람은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꼼꼼히 들여다봐야 된다. 이번 주 칼럼 끝.
1) 출처: “숫자로 보는 007”, 용원중 에디터, 뉴스엔 미디어, 2015년 11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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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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