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올드위키드송>, 비탄을 모르면 기쁨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연극 <올드위키드송>
1996년 ‘퓰리처상 드라마부문’에 최종 노미네이트된 연극 <올드위키드송>은 초연 이후 20년간 12개 도시에서 공연되어 왔다. 이미 ‘검증된 작품’인 만큼 국내 초연이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 정도. 이야기는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괴짜 교수’와 ‘까칠한 피아니스트’인 제자를 통해 음악으로 소통과 치유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처를 대하는 방법
끔찍한 기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결코 아물지 않을 상처를 바라보면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순간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가학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기억을 되살리면서 왜 그래야만 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묻고 또 묻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회피를 택할 수도 있다. 기억을 들춰내는 일이 너무 아파서 덮어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이들이다. 애써 다른 차원의 문제로 관심을 돌리면서, 자신의 아픔은 사실 별 일이 아니라고 다독이면서, 상처를 모른 체 한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되는 순간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올드위키드송>의 두 남자는 그러한 선택들 사이를 떠돈다.
1986년, 오스트리아 빈. 작은 음악 연습실에서 두 남자는 처음 만났다. 나이 든 사내 ‘조세프 마슈칸’은 음대 교수였고, 그를 찾아온 청년 ‘스티븐 호프만’은 촉망 받는 피아니스트였다. 스티븐은 자신을 미국인이라 소개했고, 마슈칸은 그에게 독일어로 인사말을 가르쳤다. 스티븐의 연주는 빈틈없는 기교로 채워져 있었지만 세세한 감성이 담기지 않았고, 마슈칸은 완벽한 연주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피아노 선율에 마음을 담아낼 줄 알았다. 마슈칸에게 있어 스티븐은 곁에 두고 싶은 유일한 제자였지만, 스티븐에게 마슈칸은 필요 없는 선생이었다. 공통분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을 잇는 것은 음악이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매개로 그들은 대화를 이어가고, 다름을 확인하며 격렬하게 부딪히고, 점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시인의 사랑’은 그들의 공용어다. 슬픔과 환희를 넘나드는 멜로디와 가사에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속에는 서로가 알아보지 못했던, 꼭 닮은 상처가 감춰져 있다. 그들은 유태인이었다.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고요해 보였지만, 두 사람을 둘러싼 세계는 여전히 과거의 시간에 붙들려 있었다. 나치에 협력했던 인물(쿠르트 발트하임)이 오스트리아의 차기 대통령으로 점쳐지고 있었고, 그와 같은 이들이 너무도 많아서 말끔한 과거 청산이란 요원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니 스티븐이 자신의 태생을 구태여 밝히지 않은 것도, 마슈칸이 끝끝내 자신의 ‘동화’를 감추려 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처를 대하는 두 남자의 태도는 달랐다. 뮌헨의 다하우 수용소에서 실존하는 과거와 마주한 뒤, 스티븐은 어두운 시간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그는 분노하고 절규하고 원망한다. 그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마슈칸이다. 그야말로 수용소의 시간을 몸 속에 지닌 채 살아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스티븐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다.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않고 스티븐을 바라본다. 호로비츠와 말러 같은 유태인 음악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유태인이 상처 받았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스티븐이 다하우 수용소를 찾아가겠다고 하자 “그곳에는 그냥 유태인 시체들이 있을 뿐”이라고 만류한다.
비탄을 모르면 기쁨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어쩌면 그것은 마슈칸이 스스로를 향해 외치는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유태인 말고도 고통 받는 사람이 많다고” 스티븐이 아닌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스티븐은 묻어두고 싶었던 기억을 펼쳐 보이는 존재다. 다하우 수용소에서 목격한 시간들을 읊어대는 스티븐 앞에서 마슈칸의 동화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1940년, 우린 짐을 싸라는 얘길 들었어. 봄이었어”라는 짤막한 문장이 이야기의 전부이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마슈칸의 흐느낌에는 훨씬 더 많은 말들이 담겨 있다.
마슈칸이 선택한 것은 회피였을까. 아니면 긍정이었을까. “난 죽지 않아. 그게 내가 받은 벌이지”라는 말 속에는 천형 같은 삶을 살아내는 자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그는 알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어쩌면 그래서 더 강렬하게 원했을 것이다.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그러나 또한 그는 이야기한다. “비탄을 모르면 커다란 기쁨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는 거야” 그리고 노래하는 스티븐에게 당부한다. “희망적으로 부르려고 노력해” 마슈칸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비탄을 알기에 기쁨도 아는 거라고, 희망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그의 선택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두 남자가 함께 부르는 ‘시인의 사랑’을 듣노라면 어렴풋이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올드위키드송>은 상처를 감추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들이 소통함으로써 서로를 치유하는 이야기다. 그들의 소통은 아픈 기억을 토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유의미한 메시지이지만, 그 범위를 공동체로 확장해 볼 때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생님이 이대로 세상을 떠나면 선생님의 동화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거라고요”라고 말하는 스티븐의 목소리는 두고두고 귓전을 맴돈다. 역사라는 공동의 기억,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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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