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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라는 포장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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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됨됨이라는 내용물이 포장지가 별로라는 이유로 개봉을 거부당한 채 버려지지는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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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5년 전, 홍상수 감독은 기억의 왜곡에 대해 다뤘다. 술자리에서, 일상에서, 심지어 심리학 논문에서까지 다뤄졌던 ‘기억의 왜곡과 보유’에 대한 관찰과 해석은 정작 영화에선 다뤄지지 않았다. 이를 <오, 수정>을 통해 홍상수 감독은 보여줬다. 남과 여, 갑과 을, 계약직과 정규직, 욕망의 실행자와 욕망의 대상자 사이의 시각 차이를. 우리는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그 기억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끊임없이 윤색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는 동일한 사건을 1부와 2부로 구성하여, 반복하여 보여주며 그 속에서 발생하는 ‘차이’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15년 뒤 같은 방식으로 돌아왔다.

 

이번 제목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흥미로운 것은 1부의 제목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이다. 영화의 제목과는 정반대다. 과거에 발생한 한 사건에 대해 ‘그때는 그게(즉, 그 접근법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지금 생각하는 방식(접근법)이 맞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해한 영화는 이렇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1부와 같이 발생했다. 따라서, 이것은 한 유부남이 한 미혼녀에게 마음이 뺏겼지만, ‘실패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지금의 방식대로 했더라면, 잘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일종의 가정이 섞인 회고담이자, ‘희망록(希望錄)’ 같은 것이다. 그 때문인지, 동일한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2부의 제목은 영화 제목과 같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이다.

 

헷갈리는가. 그럼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 1부에서 유부남인 영화 감독 함춘수(정재영)는 솔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욕망은 강하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스텝(고아성 분)을 보며, “조그만 게 뭐 이리 예뻐. 아, 조심해야지”하며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러다 고궁에서 우연히 화가(지망생)인 윤정희(김민희)를 만나는데, 그녀의 작업실에 따라가 오로지 환심을 사기 위해 작품에 대한 공허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유명한 감독의 찬사에 들떴는지, 정희는 춘수와 술자리까지 이어간다. 그 자리에서 그는 정희에게 애정 고백을 하고, 급기야 정희의 선약자리까지 따라간다. 하지만 그곳에서야 비로소 춘수가 유부남이었다는게 밝혀지고, 정희의 얼굴은 급격히 굳어간다. 이후에는 연속적인 실패담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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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부에서는 모든 조건이 같다. 발생하는 사건의 배경에는 차이가 없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춘수라는 캐릭터가 다를 뿐이다. 1부에서 여자 스텝을 보며 흔들리는 장면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 그는 1부처럼 욕망에 잠식돼 맘에 없는 찬사를 늘어놓지 않는다. 정희의 그림을 보고 “자기 위안용 작품”이라 했다 된통 당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솔직하다. 더 나아가 1부에서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겼던 술자리에서 스스로 “결혼하고 싶어요. 하지만 할 수 없어요. 이미 했거든요. 애가 둘이에요”라며 고백한다. 그런데, 정희는 이에 대해 뭐라 하지 않는다. 따라간 정희의 선약 자리에서는 정희의 지인들 앞에서 술을 마시다 말고, 옷까지 벗는다. 마치 아무것도 감추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2부에서는 정희와 마음이 통한다. 차이라면, 춘수가 했던 말이 1부와 다르다는 사실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는 자리에서 진행자의 질문을 받고 반문한다. ‘다들 왜 그렇게 말에 집착하냐고. 말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뜬금없이 흥분하는 춘수를 보며 관객은 의아해진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장면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 2부는 춘수가 과거의 실패담을 복기해, 재구성한 것이다. 그는 과연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지금 생각한 것처럼 이렇게 말했더라면, 정희와 잘 되지 않았을까 하며 자신만의 ‘희망록’을 쓰는 것이다. 그렇기에 2부의 제목은 영화 제목과 같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아닌가. 그러니까, 제목은 ‘지금(의 화법)은 맞고, 그때(내가 했던 대화)는 틀리다’라는 깨달음의 시적표현이다.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때로 우리 삶 속에서 본질은 읽혀지지도 않은 채 포장 때문에 거부당한 적은 있지 않았던가. 인간관계에서 포장이라 함은 언어, 즉 말(語)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사람의 됨됨이라는 내용물이 포장지가 별로라는 이유로 개봉을 거부당한 채 버려지지는 않았던가. 혹은 우리가 버리지 않았던가. ‘그때 내가 혹시 다르게 말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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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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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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