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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덫에는 누가 걸려들까?
연극 <데스트랩>의 임병근
가끔 극작가들의 뇌구조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는 연극을 볼 때면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 때처럼, 길게 이어지는 복잡한 분자구조식처럼 극작가의 머릿속에서도 암호 같은 비밀지도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가끔 극작가들의 뇌구조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는 연극을 볼 때면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 때처럼, 길게 이어지는 복잡한 분자구조식처럼 극작가의 머릿속에서도 암호 같은 비밀지도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연극을 볼 때면 관객들도 묘한 희열을 느끼곤 하죠. 브로드웨이 최장수 반전 스릴러, 아이라 레빈(Ira Levin)의 연극 <데스트랩>이 지난해 국내 초연 때부터 입소문이 난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그런데 대본이 아무리 좋아도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로 잘 살려내지 못하면 그건 그냥 희곡일 뿐이죠. 극작가의 상상 속의 모습을 무대에서 그보다 더 실감나게 구현해내고 있는 배우들, 그들이 연극 <데스트랩>의 또 다른 인기 비결이기도 할 텐데요. 긴 슬럼프에 빠진 극작가 시드니에게 눈이 번쩍 뜨일 희곡 ‘데스트랩’을 보낸 작가 지망생 클리포드. 이들이 이 작품의 중심축입니다. 시드니 역에는 강성진, 임철형 씨, 클리포드 역에는 임병근, 이충주, 윤소호 씨가 캐스팅돼 각자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데요. 기자는 이 매력 넘치는 배우들 중에서 묵직하면서도 섬세한 연기가 돋보이는 임병근 씨를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워낙 작품이 좋고, 초연 때 연출님과 배우들이 잘 만들어놓으신 것 같아요. 사실 관객들이 이런 스릴러 장르에 익숙한 편인데, 극 안에 표현되는 언어적인 유희가 있어서 더 좋아해 주시지 않나 싶고요.”
앳돼 보이는 얼굴과 달리 키가 굉장히 크더라고요. 임철형 씨도 작은 키가 아닌데, 두 분이 무대에 서니까 뭔가 꽉 찬 느낌이에요.
“제 키가 186cm 정도라 소극장에 서기에는 너무 크다는 얘기를 듣곤 해요. 조명이 잘리기도 하고, 소품이나 문을 다 부술 것 같다고(웃음). 이번 작품에서 철형이 형한테 고마운 게 형도 워낙 크니까 제가 다른 때보다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물론 성진이 형은 슬림해서 제가 더 커 보이겠지만요.”
무대 위 두 시드니는 많이 다른가요?
“많이 달라요. 외모적으로 풍기는 이미지가 실제 무대에서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철형이 형은 푸근한 인상이고, 성진이 형은 날카로운 매력이 있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시드니를 믿고 가는 편이라서 많이 의존하거든요. 철형이 형 같은 경우는 몰아칠 때는 확 몰아치는 반면에 성진이 형은 작가적인 이미지로 확실히 누르고 가는 면도 있고요.”
클리포드를 공유한 이충주 씨와 윤소호 씨는 어떤가요?
“소호는 초연 때 했잖아요. 그래서 소호한테 충주와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죠. 소호는 나이가 그렇게 어린 줄 몰랐는데, 왠지 부럽더라고요(웃음). 충주는 연습할 때 <마마돈크라이> 공연 중이었어요. 제가 재작년에 했던 작품이기도 해서 충주 공연을 봤는데 멋있더라고요. <데스트랩>도 첫공은 충주가 했거든요. 제가 남자 배우들한테는 꽤 야박한 편인데, 칭찬을 많이 했어요. 무대에서 굉장히 섹시하더라고요. 앞으로도 많이 잘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대 규모에 비해서는 격하게 움직이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릴러물이지만 임병근 씨의 전체적인 움직임이나 대사 처리에서는 차분한 성격이 엿보이는 것 같아요.
“제 원래 성격이 그래요. 까불대거나 나서는 편이 아니라서 캐릭터를 연기하더라도 본성은 조금 나오는 것 같아요. 사실 예전에는 차분한 역할을 많이 했어요. 정석적인 캐릭터나 모범생, 왕자... 터닝 포인트가 됐던 작품이 <쓰릴 미>였죠. 전형적인 나쁜 남자잖아요. 처음에는 부담감이 컸죠. 아내와 결혼 전이었는데, 저를 잘 아니까 원래 성격대로 하라는 거예요. 제가 차분하다가도 정말 화가 나면 순간 변하거든요(웃음). 그렇게 제 안에 있는 모습에서 캐릭터를 만들다 보니까 아무래도 더 자연스러웠나 봐요. 지금은 이런 역할이 익숙해요. <데스트랩>에서 클리포드도 광적인 작가 지망생인데, 아무리 나쁜 남자라도 한 모습일 수는 없거든요. 인간적인 모습이나 따뜻한 모습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두 성향이 한 무대에서 부딪혔을 때 파급효과가 더 큰 것 같아요.”
인터뷰도 굉장히 차분하게 하시는데, 이런 분이 어떻게 배우될 생각을 하셨나 싶습니다.
“저도 신기해요(웃음). 원래는 키가 커서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대학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배우를 꿈꾸게 됐어요. 운 좋게도 중앙대 국악대학에 신설된 음악극과 1기로 들어갔죠. 그래서 판소리나 사물놀이 등 한국적인 걸 많이 배웠는데, 프로 무대에 나오니까 한국적인 걸 써먹을 일이 거의 없더라고요. 한국적인 뮤지컬이 활성화된다면 꼭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서울예술단에 입단한 걸까요?
“그렇죠. 서울예술단에서 한국적인 창작뮤지컬을 많이 해요. 처음 들어갔을 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뻤어요. 졸업 후에 오디션도 많이 떨어지고, 힘들었던 시기였거든요. 게다가 주인공을 찾던 시기라 운 좋게도 들어가자마자 배역을 맡았어요. 많이 배웠고, 월급이 나오고 공연수당도 나오고, 당연히 안정됐죠. 그런데 좀 더 넓은 세계로 도전하려면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람의 나라> 했을 때 이지나 선생님이 <에비타>라는 작품을 제안하셔서 입단 3년 만에 큰 결정을 했죠.”
서울예술단에서 만난 김건혜 씨와 지난해 연말 결혼하셨는데, 동료 배우과 결혼하면 아무래도 좋은 점이 많죠?
“좋은 점이 훨씬 많죠. 아내인 동시에 동료라서 정말 많은 도움이 돼요. 모니터해주고 상대배우도 해주고, 배우로서 객관적으로 봐줄 수도 있고요. 그리고 말 안 해도 알잖아요, 뭐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게 안 좋은 점일 수도 있지만요(웃음).”
서울예술단 나온 뒤에 원하는 작품은 욕심껏 하셨나요(웃음)?
“저는 할 수 있고, 도전하고 싶은 작품을 심사숙고해서 고르는 편이에요. 요즘은 많은 배우들이 한꺼번에 두세 작품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저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금방 지치고 흥미를 잃게 될까봐. 사실 <데스트랩>이 첫 연극인데, 왜 선배들이 뮤지컬을 하면서도 1년에 한두 작품은 연극을 해보라고 하시는지 알겠더라고요. 뮤지컬을 하면서 연기에 대한 갈증이 많았거든요. 이번 작품은 연기적인 부분에서 깊게, 더 진지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부담도 있지만 무대 위에 재밌게 서고 있어요.”
배우는 어떤 무대에서 어떤 작품을 만나느냐에 크게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잘 걸어오신 것 같은데, 앞으로는 어떤 배우로 만들어가고 싶으세요?
“머무르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활동하고 계신 선생님들처럼 오랫동안 무대에 서고 싶고요. 지금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는데, 교직에 대한 꿈도 있거든요. 내 일을 하면서 행복한 사람, 누가 보더라도 ‘저 배우는 무대 위에서 즐기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게요. 그리고 앞으로는 1년에 한두 편 연극도 하고 싶고, 이제 대극장으로 가야죠. 대극장에서 출발해서 소극장에서 다졌으니, 이제는 중소대극장을 오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게요, 무척 안정되고 멋진 음색을 지닌 임병근 씨가 다른 연극이나 대극장 뮤지컬 무대에 서면 어떤 모습일까 기자 역시도 궁금해집니다. 그나저나 덩치나 이미지, 목소리까지 차분하고 믿음직스러운 이 남자가 돌변해서 나쁘게 굴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혹은 소름끼칠까요. 김수로 프로젝트 9탄 연극 <데스트랩>은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2관에서 6월 28일까지 공연됩니다. 시드니는 물론 클리포드까지, 외모만큼이나 서로 다른 연기 스타일을 지닌 배우들의 무대를 골라보는 재미도 클 텐데요. 무엇보다 죽음의 덫에는 과연 누가 걸려들지 객석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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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