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의 낭만적 기억상실 - <국제시장>
영화 <국제시장>
<국제시장>은 우리나라가 겪어왔던 역사의 굴곡을 덕수라는 인물을 통해 담아내면서, 복고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거리에서 문득 만나게 되는 종이인형, 낡은 장식품, 불량식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빙긋 미소 짓게 된다. 어쩌면 징그러웠을 가난과 무지, 소통불능의 기억을 매끄럽게 걸러내고, 폭력과 탄압의 역사를 감춰낸 복고에는 현실과 유리된 매끄러운 낭만만이 오롯이 담긴다. 복고는 꽤 오랜 시간, 우리의 일상 속에서 꽤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살짝 비틀어 보자면 팍팍한 현실을 과거에 대한 낭만적 기억으로 묻어보려는 현실도피로 읽힐 수 있겠지만, 여전히 복고의 감수성이 전달하는 따뜻한 위안의 힘은 치유의 순기능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복고는 그렇게 감수성의 외피와 그 내면이 다르기 때문에 부서지기 쉬운 정서이기도 하다. 추억 가득한 회고담 속 그 시절이 지긋지긋한 기억으로 남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마냥 밝고 유쾌하기엔 시대적 상처가 크고, 시대적 아픔만을 말하자면 진부해질 수 있다. 그래서 복고적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속이거나, 믿게 하거나, 혹은 설득해야 한다. 당연히 이야기의 진정성도 필요하다.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은 우리나라가 겪어왔던 역사의 굴곡을 덕수라는 인물을 통해 담아내면서, 복고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여기에 ‘아버지의 희생’이라는 보편적 감수성을 녹여내면서 감동적인 순간을 직조해 낸다. 한 국가의 역사를 특정 인물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그 삶을 통해 인생의 가치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형식의 유사성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4년 작품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한다. <포레스트 검프>의 처음과 마지막 신에 등장하는 깃털이 나비로 대체된 <국제시장>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포레스트 검프>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적 형식의 차용 혹은 인용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범위이다. 핵심은 격변기를 겪은 덕수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냐에 달려있다.
어린 시절 덕수는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을 잃고 부산으로 피난 와 부산 국제시장에서 수입품 가게를 하는 고모 집에 더부살이를 한다. 덕수의 가슴에는 ‘앞으로 네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이 새겨졌고,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열심히 일한다. 청년이 된 덕수(황정민)는 돈을 벌기 위해 독일 광부로 파견도 가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한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잃어버린 나머지 가족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출연한다.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 덕수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의 의미 있고, 비통한 사건들을 관통하고 있다. 노년에 이른 덕수의 모습에서 시작하면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한 노인의 회고담이 된다. 이해하기 쉽고, 보편적 정서를 잘 아우르는 윤제균 감독의 장기대로 덕수의 회상은 과거사의 한 덩어리를 인상적으로 보여주면서 복잡하지도 지나치게 비장하지도 않게 술술 흘러간다. 윤제균 감독은 척박한 삶 속에서도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는 덕수라는 인물을 통해 격변기를 묵묵히 견디고, 가족들을 보듬어온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어 한다.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 등 전작들에서 빛을 발했던 서민적이고 지고지순한 등장인물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유머 코드는 <국제시장>에서도 살아있다. 또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온기는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기도 한다. 황정민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달구 역할의 오달수는 신 스틸러라는 수식이 허투루 붙은 것이 아님을 이번 영화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보편적 감수성’을 위한 스토리 라인의 배치는 아쉽다. 어떤 웃음 뒤에 어떤 눈물을 보여줄지, 어느 순간에 관객들이 눈물을 흘릴지 계산된 연출과 편집은 공식적이지만, 그 덕분에 전체적 이야기는 오히려 도식적인 면이 생겨 생기를 잃는다. 그래서 황정민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줘야 할 덕수라는 인물은 평면적으로 보인다. 역사 속 굴곡을 겪어온 장년층 관객들에게 <국제시장>은 웃음과 눈물이라는 감격을 줄 수 있겠지만,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관객들에게 <국제시장>은 보온의 기능이 없는, 성기게 만든 스웨터를 입은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매끈하게 정치적 의미를 배제한 이야기 속에 평범한 개인의 희생을 찬양하는 스토리텔링 덕분인지 죽도록 고생한 아버지, 그 과거는 아프지만 이상하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투적인 이미지에 갇히기 쉽다. 어쩌면 우리에겐 쉽게 떠올려지는 올바른 아버지의 이미지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국제시장>을 통해 윤제균 감독이 그려낸 아버지에 대한 헌사는 의미 있지만, 상투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훌쩍 높이뛰기만 하는 것 같다. 개봉 직후 윤제균 감독은 아버지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영화라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감독의 말은 정직하다. <국제시장>은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관객들이 보고 불편할 역사적 장면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복고의 낭만에 기대어 직조된 회고담은 그렇게 정치적 함의를 일부러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이 역사와 정치, 그리고 그 함의가 가진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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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