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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시간

나에게 다가올 시간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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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배들에게 다시 태어나면 또 엄마가 될 건가요? 라고 물었다. 그건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었다. 힘들지만 엄마가 된 게 제일 잘한 일이라는 파와 결혼 자체를 안 하고 철저히 고독을 즐기며 살겠다는 파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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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딸일 거라고 생각했을 때는 밖에 나가면 여자애들만 보였다. 분홍색 우주복을 입고 유모차에 누워 있거나 고무줄로 몇 가닥 안 되는 머리를 묶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부터 타이츠에 레이스가 달린 치마를 입거나 리본이 달린 구두를 신고 뛰어가는 여자아이들까지.


그러나 뱃속의 아기가 아들이라는 걸 안 다음날부터 신기하게도 거리에는 남자들이 넘쳐났다. 아직 남자아이의 귀여움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했고 어떻게 키워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나는 남자애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남자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자동차와 로봇을 좋아하고 총과 공룡을 가지고 놀겠지. 자전거를 타고 공을 던지고 쿵쿵거리며 뛰어다니고……. 특별히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남자아이들의 기호와 성장에 대해 두서없이 그려봤다. 내가 장난감 얘기를 꺼낼 때마다 옆 사람은 그런 거 안 사줄 거야, 그런 거 안 해줄 거야, 하며 말을 받았다. 왜? 하고 묻자 남자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결핍에 대해서도 알아야 돼. 표정은 단호하지만 ‘아들바보’가 될까봐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얼마 뒤 평소에 좋아하는 C선생님의 출간 기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우연찮게도 그 자리에 모인 몇 안 되는 여자들은 다 아이 엄마였고 형제나 남매를 키웠다. 내 부른 배를 보고 어머, 몇 개월이야? 잘됐어요, 축하해, 하며 다들 반색했다. 어느새 글을 쓰는 임산부들만이 할 수 있는 대화가 오갔고 어디 가서 이런 얘기하면 욕먹겠지만, 이라는 단서가 자주 따라 붙었다.


아이를 낳고 나면 비로소 어른이 되지. 그런 면에서 남자들은 영원히 애야.


K선생님의 말에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근데 아들을 낳으면 어른이 되기 전에 짐승의 시간이 먼저 와, 라는 C선생님의 말에 문학 선배이자 아들 엄마 선배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극성스럽거든. 그거 따라 다니다보면 한동안은 그냥 짐승으로 사는 거야. 그걸 지나야 인간이 되고 어른이 되지.


아직 아이를 낳지도 키워보지도 않은 나의 관심은 오직 엄마가 되면 소설을 더 잘 쓸 수 있는가, 였다. 그 질문에 다들 그게 꼭 그렇진 않지, 하며 웃었다. 그 대신 삶이나 시간의 밀도가 훨씬 빽빽해진다고, 시간을 아까워하면서 살게 되는 건 확실하다고 했다. 나는 선배들에게 다시 태어나면 또 엄마가 될 건가요? 라고 물었다. 그건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었다. 힘들지만 엄마가 된 게 제일 잘한 일이라는 파와 결혼 자체를 안 하고 철저히 고독을 즐기며 살겠다는 파로 나뉘었다.


내 인생에 이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올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아이와 관련된 얘기에는 관심도 없고 화제가 그쪽으로 흘러가면 잠자코 듣는 편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도 많고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많아 나는 점점 수다스러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닥쳐오고 나를 덮칠 ‘짐승의 시간’에 대해 짐작해봤다. 그건 마치 그림책으로 보는 코끼리의 모습과 비슷할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상상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관련 기사]


- 여자의 배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메슥거림 (2)
- 아기를 위해 몸과 마음의 공간을 늘리며
- 남자 혹은 여자로 산다는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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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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