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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폭력에 맞서는 방법, 하드보일드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스타일이며 애티튜드다
시대가 변해도, 계속 변주되고 뒤틀리면서도 하드보일드가 유효한 이유는, 결국 하드보일드는 살아남은 자, 아니 살아가야만 하는 자의 서사(敍事)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미로의 출구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만은 간절하게 남아 있기에. 그게 하드보일드의 비극적인 세계관이다.
하드보일드는 이제 현실에서도 익숙한 단어가 되었지만, 뜻을 정확히 설명하려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게 된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와 레이몬드 챈들러,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등 많은 작가와 작품이 떠오른다.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드보일드’는 대체 무엇일까? 하드보일드를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더 들어가 보자. 영화사전을 보면 명확하게 상이 드러난다.
여기서 ‘비정함’의 속뜻은 캐릭터나 사건이 비정한 것이 아니라 작가(감독)의 표현이 건조하고 냉정하다는 의미이다. 곧 세계를 대하는 태도 혹은 스타일을 뜻하는데 이는 작가(감독)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부조리한 세계의 단면을 응시하는 예술가의 냉소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견해를 덧붙이지 않은’ 건조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대실 해멧과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작가의 추리 소설을 통해 그 기법이 세련돼졌고 이것이 영화로 넘어왔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세계는 회의와 불안에 사로잡혔다. (유럽뿐이긴 하지만) 전 세계가 휘말려들어 엄청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미증유의 전쟁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장밋빛 미래가 약속되었던 자본주의의 모순이 격발하면서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희망은 점점 희박해졌다. 인간은 과연 행복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을까. 인간은 조금씩 개선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절망은 하드보일드를 낳게 한 이유였다. 하드보일드가 영화로 넘어가면 ‘필름 누아르’가 되었다.
고전적인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탐정은 배우자의 불륜, 연인의 실종 같은 일상의 사건을 풀어가다가 거대한 사회의 악과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구해낸다 해도,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속해 있는 세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의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챈들러가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 필립 말로가 ‘잘못된 곳에 있게 된 남자’라고 말한 것은 적절하다. 터프함과 냉철한 이성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자신의 몸을 지킬 수는 있지만,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필름 누아르의 걸작 <차이나타운>에서 사립탐정 제이크는 세상 전체가 ‘차이나타운’임을 깨닫는다. 세상의 어떤 법과 질서도 통하지 않는, 무질서와 타락의 온상을 상징하는 차이나타운. 제이크는 자신의 힘과 지략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지만, 무자비한 세상 앞에서 그의 노력은 단순한 발버둥에 불과하다.
대중적인 펄프 잡지에 실린 탐정 소설은 대부분 행동에 역점을 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작품이었다. 그것을 하드보일드라는 형식으로 굳건하게 세워낸 작가는 뉴욕타임즈에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학파의 학장’이라 표현한 대실 해밋이었다. 『몰타의 매』의 샘 스페이드는 대실 해밋이 생각하는 사립 탐정의 이상형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생존이고,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붉은 수확』에 나오는 탐정은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에 소속된 ‘나’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탄광촌의 악을 일소해버린다.
보통 하드보일드의 탐정들은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순결성을 고수하려 한다. 타락한 세상에 침윤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도덕률과 가치를 치열하게 고수하는 것. 그런데 대실 해밋의 탐정은 조금 다른 스탠스를 취한다. ‘나’ 역시 원칙이라는 단어를 꺼내기는 하지만, 악을 쓸어버리겠다고 말은 하지만, 견고한 현실의 벽에 절망하지 않는다. 절망하기에는 ‘나’는 너무 현실적인 인간이다. 절대 현실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만 몰두하고 완수한다. 우수나 고독 같은 것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
반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 『안녕 내 사랑』에 나오는 필립 말로는 터프함과 냉소를 가진, 상실감에 고뇌하는 우수어린 탐정이다. ‘터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소. 그러나 젠틀하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소.’라는 필립 말로의 말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있다. 대실 해밋의 ‘나’는 젠틀하지 않다. 상대를 속고 속이면서 자신의 정의를 밀고나갈 뿐이다. 필립 말로는 잔혹한 세상에, 온갖 진흙탕에 발을 담근 채로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는 남자다. 로스 맥도널드의 『위철리가의 여인』에 나오는 루 아처는 필립 말로에 비해 이성적이고 탁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로스 맥도널드가 그리는 사건은 독립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이 응집된, 깊게 뿌리박혀 있는 복합적인 사건이다. 루 아처는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고 때로 절망하지만 사건들의 중심으로 깊이 파고들어간다. 그것이 그가 할 일이니까.
하드보일드가 반드시 신중하고 사려 깊은, 고독한 남자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 인기를 끈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가 주인공인 <내가 심판한다>, <내 총이 빠르다> 등은 쾌락주의적 하드보일드라고 부를만하다. 고뇌 같은 건 일절 없고 악당이라고 생각되면, 복수의 대상이라고 판단이 되면 무조건 잡아서 패고 때로 죽여 버린다. 여성은 단지 쾌락의 대상일 뿐인 남성우월주의자이고 극렬한 반공주의자인 마이크 해머. 마이크 해머의 인기는 오로지 폭력과 섹스에 초점을 맞춘 싸구려 범죄소설의 양산을 부추겼다. 한때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신문에 연재되었던 스릴러소설들이 그랬듯이.
일본으로 넘어간 하드보일드는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 『안녕 긴 잠이여』 등은 필립 말로를 일본이라는 시공간으로 보낸다면 아마도 사와자키처럼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을까 싶은 작품이다. 하라 료의 소설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을 이상향으로 삼으면서, 일본의 ‘하드보일드’를 완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오사와 아리마사의 『신주쿠 상어』의 주인공 사메지마 형사는 경찰 내부의 비리를 알고 있는 탓에 방범과로 좌천되었고, 한 마리 늑대 아니 상어처럼 홀로 거대한 악과 싸우는 형사다. 다분히 영웅주의적이고, 한참 어린 록 밴드의 보컬이 여자친구인, 그다지 고독하지 않는 일본식 하드보일드의 형사.
하드보일드의, 절망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맛보고 싶다면 여자 탐정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얼굴에 흩날리는 비』 『천사에게 버림 받은 밤』 등을 보면 좋다. 자신만의 규율, 정의마저 사라지고 이전투구 속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목표가 된 신세대 하드보일드를 만나고 싶다면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 3부작인 『불야성』 『진혼가』 『장한가』 가 있다.
시대가 변해도, 계속 변주되고 뒤틀리면서도 하드보일드가 유효한 이유는, 결국 하드보일드는 살아남은 자, 아니 살아가야만 하는 자의 서사(敍事)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미로의 출구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만은 간절하게 남아 있기에. 그게 하드보일드의 비극적인 세계관이다. 알 수는 없지만, 믿을 수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스타일이며 애티튜드다. 작가가, 캐릭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세상의 폭력에 맞서 살아남는 한 가지 방법. 하드보일드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역사를 알고 싶다면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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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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